광복절 주간, 더 큰 울림 준 DMZ 평화관광
30여 명 시범투어단, 또 다른 DMZ 관광
한반도 중심, 중서부 DMZ 역사·문화 조명
2018-08-18 04:14:12 , 수정 : 2018-08-22 02:17:31 | 이상인 선임기자

[티티엘뉴스] 비무장지대(DMZ)에 이런 역사적인 곳이 있었나?  DMZ 내 감춰졌던 역사와 문화가 ‘DMZ 평화관광’으로 속살을 드러냈다.
 

약 40년간 DMZ 관광이라면, 철책선 중심으로 이어진 전망대와 땅굴 등 대부분 안보관광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2018년 정전협정 및 DMZ 생성 65주년과 함께 남북, 북미 정상회담으로 평화무드가 조성되면서 안보관광에서 벗어난 새로운 DMZ 관광에 대한 욕구가 일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인 테마가 ‘DMZ 평화관광’이다.
 

▲이번‘DMZ 평화관광’ 투어 참가한 일행이 승전OP에서 찍은 단체 기념사진
 

▲버스에 부착된 DMZ 평화관광을 알리는 표시판
 

DMZ 평화관광은 통일 한국 및 한국사의 중심인 경기 북부와 인천 강화 등 DMZ 접경지역 일원의 역사, 문화, 예술의 융·복합적 접근을 시도하고, 그곳의 스토리를 찾아 떠나는 문화, 역사, 철학을 종합한 고품격 여행이다.
 


▲시범투어단 일행이 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17일 진행된 ‘한반도 중심, 중서부 DMZ 역사문화 여행’ 에는 30여 명이 참가했다. 시범 투어는 2박 3일간 경기 북부 접경지역 3개 시, 군 및 인천시, 강화군의 DMZ 접경지역을 돌아보게 된다. 이번 시범 투어는 DMZ관광(주)와 DMZ 문화원이 주최했으며, 경기도, 경기관광공사, 한국관광공사, 연천-파주-김포-강화군 등이 후원하고 있다. DMZ 전문 여행사인 DMZ 관광(대표 장승재)은 시대적 요구에 맞는 DMZ에 대한 새로운 상품 'DMZ 평화관광'을 개발, 출시했다.

 

양산에서 참석한 주부 이점숙(59. 여) 씨(▲)는 “지인 소개로 작년에 DMZ 관광에 참석했었는데, 이번 행사는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되어 혼자 참석하게 됐다”며, “외국 여행은 비행기 타는 것이 번거롭고 그런데 국내 여행은 그런 것이 없어 좋고, 작년 투어와는 달리 이번 DMZ 평화관광은 너무 좋다”고 즐거워했다.

 

광주 북구 다문화 가족지원센터에서 사회복지사로 근무하고 있는 김 옥(60. 여) 씨(▲)는 “지인 소개로 참석하게 됐으며, 고려 역사를 재인식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순천에서 에코월드 공정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조연수(55. 여)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이번 행사를 접하게 됐다”며, “ DMZ에서 역사와 문화, 그리고 국방을 다 함께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밝혔다.

 

일행 중 유일하게 부인과 아들을 동반한 박종진(55. 운수업) 씨(▲)는 “딸이 신청해 참가하게 됐다. DMZ 안보관광인줄 알았는데 민통선 내에 있는 역사, 문화 유적지 탐방 느낌이 있다” 며, “몰랐던 고려 유적지를 보고, 알게 되어 좋았다”고 말했다. 

 

시범투어단을 격려차 찾아온 류재현 연천군 문화관광체육과 관광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천에는 관광자원이 많다. 홍보가 덜되어 좀 덜 알려져 있다. 연천군이 추구하는 관광 방향은 이합집산 되어 있는 관광을 모아서 4개 권역으로 묶어 관광개발을 집중적으로 선택, 투자할 계획이다. 첫째 1권역이 한탄강 댐을 비롯해 재인폭포 등의 자연적인 경관을 살린 1권역이 되겠고, 2권역이 동이대교, 동이리 주상절리, 구간이 되겠으며, 3권역이 파주에서 넘어오는 장단면에 고랑포구 공원을 살려서 파주 및 인근시와 인접해서 관광활성화에 시킬 계획에 있고, 4권역 등을 권역별로 묶어서 북쪽에서는 철원군, 서쪽에서는 파주, 북쪽에서는 포천, 남쪽에서는 동두천, 양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게끔 투자, 육성할 계획에 있다.


대한민국 전 국민이 연천에 오면 좋겠지만, 가장 근접한 거리에 있는 인근 시, 군에의주민부터 먼저 끌어드린다는 각오 아래 인근 파주, 고양, 김포, 포천, 동두천, 의정부 등을 대상으로 점차 분포를 넓어 나가면 차후에는 대한민국 전 지역에서 연천을 방문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


유엔군 화장장 같은 곳도 문화재 담당 부서에서 복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요즘 관광의 트랜드가 스토리텔링인데 화천군도 잘 하도록 노력하겠다. 관광객 여러분 연천군으로 많이 오세요."

 

▲DMZ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지뢰 위험지역 표시

 

이번 시범 투어를 주최/주관하는 장승재 DMZ 관광 대표(▲)는 “10월 초 강원도 고성, 인재, 양구 쪽의 DMZ 접경지역 투어와 12월에는 5박 6일에 걸친 ‘DMZ 풀코스 투어’도 진행할 계획으로 있다”면서, “통일한국과 한국사의 중심인 경기북부 DMZ 일원 현장 재조명과 함께 살아 숨 쉬는 탐방 교육여행, 그리고 지속적인 DMZ 신규 상품개발을 통해 DMZ 일원의 접경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지자체와 함께 계속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17일 08:30분 서울 공덕역에서 출발한 시범투어단의 첫날 일정은 연천의 DMZ 인접 지역을 중심으로 투어가 진행됐다. 승전OP, 1.21북한간첨침투로, 경순왕릉, 호로고루성, 숭의전, 유엔군 화장장, 임진강 중류 동이리, 재인폭포 한탄강땜 물문화관, 베게용암 등을 찾아보는 순으로 이뤄졌다.  

 

●승전OP

▲승전OP 앞에서 같이 온 일행이 정훈병사와 한 컷트


제1땅굴을 발견한 육군 제25사단이 관할하고 있는 중부전선 최북단에 위치한 전망대이다. 이곳에서는 관광객들에게 DMZ과 민통선, OP와 GOP, 철책선과 북한의 군사시설, 북쪽의 산야 모습을 관망하면서 사단 정훈병으로부터 현재의 지형과 대치 상태 등을 자세하게 들을 수 있다.
 

▲승전OP에서 투어 일행들에게 명쾌하게 설명해 준 25사단 정훈병 정진우 병장 


최근 남북, 북미 정상회담으로 예전보다는 긴장감이 훨씬 덜 하지만, 북한 지역을 볼 때마다. 정전과 평화통일의 중요함을 느끼게 하며, 북한에 대한 증오와 애잔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1.21 북한간첩침투로

▲1.21침투로 입구에 세워진 표지판

 

▲당시 공비들의 침투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논 모형물

 

1968년 북한의 공비들이 청와대 폭파를 목적으로 침투했다. 이곳에는 당시 공비들의 최초 침투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당시의 비무장지대에 설치되어 있던 철조망 일부가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

▲1.21침투 당시의 설치되어 있던 철책선의 모습

 

이곳은 아직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곳으로 당시의 역사와 분위기를 회상케 하고 있다.

 

 ●연천 경순왕릉

▲경순왕릉 전경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927~935 재위)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2번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지난 1975년 6월 25일 사전 제244호로 지정됐다.

▲경순왕릉에 참배하기 위해 모인 투어단 일행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있는 경순왕릉은 고랑포 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부 쪽에 단독으로 위치해 있다.

▲경순왕릉 입구에 세워진 표지판

경순왕의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잊혔던 것을 1747년(조선 영조23년) 후손들이 왕릉 주변에서 묘지석을 발견함으롯써 되찾게 됐다. 따라서 경순왕릉 주변에는 1986년 건립된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의 재실 건물과 경순왕릉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가 비각 안에 놓여 있다.

 

▲가까이서 본 경순왕릉의 모습

 

경순왕은 후백제의 잦은 침략과 각 지방 호족들의 활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는 상태가 되자,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투어단 일행이 경순왕릉에 참배하는 모습

 

고려에 나라를 귀부한 경순왕은 태자보다 높은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귀부한 지 43년 후인 978년(고려 경종3년) 세상을 떠났다.

▲경순왕릉 옆의 비각 내에 있는 비석의 모습

 

신라의 왕이었지만 신라 땅에 묻히지 못한 이유는 고려 조정에서 ‘왕의 구는 백리 밖을 나갈 수 없다’ 하여 이곳 장단부 고랑포리 성거산에 왕의 예로 장례를 모셨다고 한다.

 


●연천 숭의전(崇義殿)

▲고려시대 왕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382-27(아미리 7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지난 1971년 12월 27일 사적 제223호로 지정됐다.

숭의전은 조선시대 전조(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 태조 6년에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한 것이 시초다.

▲숭의전 부속 건물의 모습

 

숭의전은 서울의 종묘 같은 곳. 그러나 종묘는 왕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지만, 연천의 숭의전은 황제의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한 차원 높다. 제사를 모시는 초혼관의 모자도 종묘는 왕이 쓰는 9줄의 모자를 쓰지만, 숭의전의 초혼관은 황제가 쓰는 12줄의 모자를 쓰고 제사를 지낸다.

▲숭의전 앞에 수령 약 550년 이상된 느티나무 수종의 보호수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유는 조선시대의 종묘는 중국의 속국이었지만, 숭의전의 고려시대는 중국의 속국이 아니었고, 대등했으며, 한때는 중국보다 높았기 때문이라고.

이곳 숭의전에서는 1년에 4월과 10월 2차례 황제의 제사를 지낸다. 4월 제사는 평범하게 지내지만, 10월 제사는 2일간 축제 형식으로 지낸다.

▲투어단 일행이 원화식 연천군 문화관광해설사로부터 숭의전에 대한 해설을 듣고 있다

 

3번의 재건을 통해 현재의 숭의전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재 재건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숭의전을 비롯해 배신청, 이안청, 전사청, 앙암재 등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 외신문, 협문 3동, 운조문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숭의전 부속건물의 태극문

 

이들 부속건물은 모두 돌담으로 둘려 내부가 잘 보이지 않으며, 앙암재와 전사청은 각각 별도로 독립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마전군 읍지에 의하면, 1899년 당시 숭의전은 지금 재건된것보다 규모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는 18칸 규모의 정전과 배신청, 이안청, 향배청, 전사청, 주방 등의 건물과 2개의 문이 있었다고 한다.

▲숭의전 실내 위패를 모셔놓은 모습

 

▷숭의전: 고려 4왕의 위패를 모신 정전. ▷이안청: 숭의전의 청소 및 공사 시에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위패를 모실 때는 이안제와 환안제를 올려 고유례를 행했다) ▷배신청: 고려 16공의 위패를 모신 곳 ▷전사청: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곳 ▷앙양재: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폐 등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

▲숭의전 입구에 위치한 문화관광해설사의 집

1789년(정조13년) 마전군수였던 한문홍이 숭의전 수리를 마치고 옛 왕조의 영화와 쇠락 속에 담긴 무상함을 담아 숭의전이 내려다보이는 잠두봉 절벽에 칠언칠구의 내용을 보면,

“숭의전을 지은 지가 사백 년이 되었는데, 누구로 하여금 목석으로 새로 수리하게 하는 고, 강산이 어찌 흥망의 한을 알리요, 의구한 잠두봉은 푸른 강물 위에 떠 있구나, 지난 세월 만월추에 마음 슬퍼하였거늘, 지금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묘궁을 수리 하였네, 조선은 생석을 갖추어 고려왕들을 제사토록 하였으니, 아마도 숭의전은 징파강(임진강의 별호)과 더불어 길이 이어지리라”라고 쓰여 있다. 
 

●유엔군 화장장

▲유엔군 화장장 표지판이 서 있는 입구의 모습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돕기 위해 파견된 많은 유엔군 전사자들을 화장한 곳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유엔군이 참전했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쟁 초반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북진하였으나.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38도선 일대로 물러났다.

▲유엔군 화장장의 전체 모습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1951년 7월부터 휴전 협상이 진행됐다. 국군과 유엔군은 휴전에 대비하여 고지 쟁탈전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유엔군 화장장은 이때 희생된 유엔군을 화장하기 위해 건립됐으며, 휴전 직후까지도 사용한 화장 시설이다.

▲화장장 중앙에 굴뚝의 모습이 보인다


당시의 건물 벽과 지붕은 훼손됐으나 일부 벽과 가장 중요한 화장장 굴뚝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알려주는 듯하다. 주변의 돌을 이용하여 막돌 허튼층 쌓기로 만들었다. 한국전쟁 유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유엔군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시설로 가치가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투어단 일행이 여기서 화장된 유엔군 전사자들에게 명복을 비는 묵념을 올리고 있다

 

연천군에서는 앞으로 이곳을 잘 정비하고 옛 모습을 복원할 계획 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을 찾은 시범투어단은 경건한 마음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이 땅에서 희생한 그들을 추모하며 명복을 비는 묵념을 올렸다.

 


●당포성 동벽

▲당포성 동벽의 전체 모습

당포성은 고구려 시대 임진강변에 돌로 쌓은 평지성이다. 임진강과 당개나루터로 흘러드는 하천이 형성한 삼각형 모양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고구려성이다. 강에 접해 있는 두 면은 절벽이기 때문에 별도의 성벽을 쌓지 않았으며, 평지로 연결되어 적이 쉽게 공격할 수 있는 나머지 한 면(동쪽)에만 높고 견고한 성벽을 쌓아 내부를 성으로 사용했다.

▲당포성을 재현해 논 전체 사진

 

당포성 동벽은 성내로 진입이 가능한 동쪽 방면을 차단하는 방어시설이다. 성의 규모는 높이 6m, 폭 31m, 길이 50m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돌을 쌓아 만든 성벽으로 보이지만 석성을 쌓기 전에 먼저 점토를 다져 쌓은 후 그 외면에 석정을 쌓아 올린 토심석축의 구조이다. 중심 성벽이 받게 되는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3단의 보축성벽을 쌓았으며, 성벽 앞에는 폭 6m, 깊이 3m의 구덩이를 파서 적이 쉽게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 했다.

 ▲당포성 동벽의 모습


동벽 외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조성된 수직의 기둥홈이 관찰되는데, 중국 집안의 환도산성, 패왕조산성, 흑구산성, 평양의 대성산성 등 고구려의 산성들에서 확인된 바 있는 특징적인 것이다. 특히 당포성 동벽에서는 수직 기둥홈이 하부의 확과 세트를 이루고 있어 주목된다.

▲당포성 동벽 뒷편 위로 올라가는 계단

 

현재는 성벽의 훼손 및 붕괴 위험이 있어 흙을 덮고 잔디를 식재하여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


●재인폭포

▲재인폭포 입구 표지판

한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형 중 한 곳인 재인폭포는 보개산과 한탄강이 어우러지는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맑은 물로 인하여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연천군의 대표적인 명승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재인폭포 관망대(좌)와 물이 말라 버린 재인폭포(우)의 모습

재인폭포 북쪽에 있는 지장봉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높이 약 18m에 달하는 현무암 주상절리 절벽으로 쏟아지는 것이 장관이다. 현재 폭포의 위치는 두부 침식작용으로 한탄강에서 약 300m 이상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재인폭포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 지금은 공사 중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폭포 아래에는 다양한 암석들과 더불어 하식동굴, 용암가스튜브 등이 관찰된다. 또한, 이곳은 천연기념물 어름치와 멸종위기인 분홍장구채 등의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 재인폭포는 무더위와 가뭄으로 인해 폭포수가 고갈되어 물이 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이며, 폭포로 내려가는 계단도 공사 중으로 인해 출입이 금지된 상태이다. 연천군은 내년에도 물이 없을 것을 대비해 물을 인공으로 끌어 올려 아름다운 폭포의 모습을 연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재인폭포는 이름과 관련된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고을원의 탐욕으로 인한 재인의 죽음과 그 아내의 강한 정절이 얽힌 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문헌에는 전설과는 상반된 기록으로도 전해 내려온다.

먼저 아름다운 전설로는, 옛날 어느 원님이 이 마을에 사는 재인(才人) 아내의 미색에 반해 그녀를 탐하고자 이 폭포 절벽에서 재인으로 하여금 광대줄을 타게한 뒤 줄을 끊어 죽게 하고 재인의 아내를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절개 굳은 재인의 아내는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거짓으로 수청을 들며 원님의 코를 물어뜯고 남편이 죽은 재인폭포에서 자결하였는데, 그 뒤부터 재인의 아내가 원님의 코를 물었다 하여 ‘코문리’라 불리게 됐으나, 한문에 코자가 없어 ‘고문리(古文里)’로 부르게 됐다는 전설이다.

반면, 이 마을에 사는 재인(才人)이 하루는 마을 사람과 이 폭포 아래에서 즐겁게 놀게 됐다. 자기 재주를 믿고 흑심을 품은 재인은 그 자리에서 장담하며 약속하기를 ‘이 절벽 양쪽에 외줄을 걸고 내가 능히 지나갈 수 있다’라고 호언장담하자. 마을 사람은 재인의 재주를 믿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자기 아내를 내기에 걸게 됐다.

재인은 벼랑 사이에 놓여 있는 외줄을 타기 시작하는데, 춤과 기교를 부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평지를 걸어가듯 하자 이에 다급해진 마을 사람은, 재인이 줄을 반쯤 지났을 때 줄을 끊었고, 재인은 수십 길 아래 구렁으로 떨어져 죽게 됐다. 이러한 일로 이 폭포를 재인폭포로 부르게 됐다‘는 상반된 전설을 담고 있다.


●한탄강 물 문화관

▲물 문화관 입구 모습

한탄강(漢灘江)은 클 한(漢), 여울 탄(灘)의 한자를 써서, ’큰 여울의 강‘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한탄‘이란 이름은 ’대탄(大灘)‘에서 유래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철원도호부 편에 ”체천(砌川)의 근원이 철령인데 남쪽으로 흘러가서 경기 양주의 북쪽으로 들어가 대탄(大灘)이 된다“라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 문화관의 로고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 김화 편에도 ”말흘천은 김화 서북 27리에 있는데 양주 대탄강으로 흘러 들어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 ’해동지도‘, ’여지도‘, ’광여도‘ 등에 대탄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도 대탄 즉 한여울이 옛 양주목 관할인 현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와 전곡읍 전곡리 사이 한탄강에 존재하고 있다. 이 대탄강의 ’대(大)‘자가 크다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인 ’한‘으로 바뀌어 한탄강이 된 것. ’한‘은 원래 은하수(漢)을 뜻하며, 크다, 맑다, 아름답다의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물 문화관 1층 전시실 내부의 모습


한탄강땜 물 문화관은 물에 관한 체험, 놀이는 물론 다양한 문화행사를 즐길 수 있는 열려 있는 공간이다. 1층은 한탄강의 유래와 생성과정을 이해하고 놀이를 통해 물을 배우고 체험하는 친수 공간이다. 이곳에는 큰 여울 시간놀이터, 자연놀이터, 희망놀이터, 연천군 홍보관 등이 있다.
 


▲물 문화관 1층 입구의 모습


2층은 부모와 어린이가 함께 즐기는 놀이터와 쉼터, 전시, 관람 등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이다. 여기에는 어린이놀이터, 쉼터, 기획전시실, 다목적실, 대강당 등이 있다. 주변 관광지로는 재인폭포, 한탄강땜, 군남댐 등이 있다.

 

▲물 문화관 1층 전시실을 돌아보는 어린이의 모습

 

관람시간은 화~일요일 10:00~17:00까지며, 매주 월요일, 법정 공휴일, 근로자의 날은 휴관한다. 단체관람 시 물 문화관 해설사가 안내해 준다.
물 문화관은 ‘물이 여는 미래, 물로 나누는 행복’으로 물과 함께 행복한 내일을 열고 있다.

 

●아우라지 베개용암


▲베개용암 전경

 

베개용암은 차가운 물과 만나 빠르게 식을 때 그 표면이 둥근 베게 모양으로 굳어서 생긴 것을 말한다. 신생대 중기 무렵 북한의 평강 오리산에서 분출한 현무암질 용암은 한탄강 계곡을 따라 남서 방향으로 흘러내리다 이곳 아우라지에서 영평천의 차가운 물과 만나게 되자 강물과 접촉하는 용암의 표면이 급하게 식으면서 베개용암이 만들어지게 됐다.

 

▲베개용암 입구에 설치된 표시판

 

대개 깊은 바다에서 용암이 분출할 때 생성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곳 아우라지 베개용암은 바다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내륙지역의 강가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매우 희귀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베개용암을 근접촬영한 모습

 

50만 년 전에는 재인폭포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두부 침식으로 계속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 강이 얼면 강에서 베개용암을 더욱 가까이 볼 수 있다.


 

취재협조 :  DMZ관광(주),  DMZ 문화원

 


연천 DMZ= 이상인 선임기자 lagolftime@tt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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