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이 진지한 칼럼>
최근 tvN 드라마 ‘도깨비’의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다. ‘도깨비 신드롬’이란 신조어가 생성될 정도로 매일 그 인기가 정점을 찍고 있다. 출연 스타들의 인기와 더불어 드라마의 배경이 된 캐나다 퀘벡에 대한 관심도 수직 급등하고 있다.
이 드라마의 근원은 한국의 도깨비 설화라는 단편성에 기대고 있지만, 드라마의 전개는 매우 다이나믹하고 스토리를 지탱해주는 탄탄한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김신(공유 분)과 지은탁(김고은 분)의 사랑방식은 과거 ‘사랑한다 미안한다’의 연상연하 로맨스 플롯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도깨비는 현실의 로맨스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환상같은 현실과 진짜 현실의 세계를 자유자제로 오가며 로맨스를 완성한다. 도깨비가 사는 공간은 풍요와 여유로 상징되고, 지은탁이 사는 현실은 빈곤과 불행을 여실 없이 보여준다.
지은탁은 불행과 불운의 아이콘이고, 현실에서 그 무엇도 그녀에게 우호적인 것은 없다. 친구들은 그녀를 왕따시키고, 담임은 그녀의 모든 것이 탐탁지 않다. 유일한 혈육인 이모네 식구마저 그녀에게 돈을 못 빼앗아 혈안이다. 이 드라마에서 현실 혹은 한국은 불행과 불합리함이 극대화된 공간으로 묘사된다. 힘 있고 많이 가진 자에게만 배려가 돌아가는 아주 잔혹한 세계다.
하지만 지은탁이 김신을 만나는 순간, 현실은 환상이 되고 불행은 행복으로 변모한다. 김신과의 만남으로 생기는 환상의 사건과 공간들은 현실에서의 불운과 고통을 서서히 치유한다. 그리고 김신이 사는 캐나다 퀘벡으로 공간이 바뀌면 불안과 불행은 사라지고 완벽한 로맨스가 극대화된다.
퀘벡은 환상과 풍요의 공간이자 비이해적인 사랑의 공간이다. 지은탁에게 김신은 유일한 희망의 통로, 환상과 현실의 경계이며, 불행과 행복의 지평선이다. 김신 역시 마찬가지다.
900년 넘게 산 도깨비이자 30대 중반 아저씨, 불행을 끌어안고 사는 철부지 19살 여고생의 로맨스는 현실에서 보면 원조교제라고 할 만 하다. 하지만 이들의 로맨스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이 드라마가 환상과 현실의 특이점을 지나며, 서로 치유를 통해 로맨스를 완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신과 지은탁은 결핍을 안고 산다. 거대한 역사속의 원한과 불멸이라는 번뇌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환상속의 김신. 그리고 현실이라는 불합리와 모순 속에 사는 지은탁은 사랑이라는 중력으로 연결된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공간과 차원을 연결하는 유일한 매개 수단이었던 '중력'의 역할을 이 드라마에서는 사랑이 대체하고 있다.
두 남녀의 비논리성과 결핍은 서로의 이기심을 자극하지만 결국 그것이 서로를 그리는 사랑의 또 다른 방식임을 깨닫게 된다. 현실의 불행은 환상으로 치유되고, 환상과 현실의 교차점에서 미움과 호기심은 따스한 사랑으로 바뀐다.
찌질한 현실의 불행의 연속성에도 지은탁이 아름다운 것은 울면서도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어서다. 화려한 환상 속에 김신이 그저 애처로운 것은 그도 결국 사랑을 이기진 못해서다.
도깨비와 소녀의 사랑은 유치하지만 진지하다. 그리고 진지하지만 슬프다. 이 ‘웃픈’ 사랑이 또 얼마나 시청자들을 들었다 놨다 할지 기대해본다.
양재필 기자 ryanfeel@tt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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