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엘뉴스] 국제화시대에 대한 단상
오랜만에 명동 나들이를 갔다가 너무나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미 신자유시대와 함께 도래한 세계화도 한참이나 진행된 지금이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국제화’를 한창 화두에 올리던 그 시절부터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문제를 안고 있다. 오늘 칼럼의 제목을 ‘국제화시대’라고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명동에 위치한 유명한 L백화점은 청결유지를 포함하여 고객서비스가 최상인 곳인데, 화장실에 갔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남자화장실도 아닌 여자화장실임에도, 좌변기 주변 바닥에 소변이 튀어 지저분하기도 하고, 냄새도 심하게 났다. 지하철역 화장실보다도 더 지저분해서 깜짝 놀랐다. 마침 화장실을 관리하시는 분이 들어오시기에,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여쭤봤다.
“여긴 늘 이렇습니다.”
그 분은 대답을 하고서 정말 너무 힘든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나도 더 이상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고생하시네요, 정말. 수고하세요.”
그러고 나오는데 정말 너무 마음이 씁쓸했다. 나는 어느 민족을 싸잡아서 흉보는 데는 정말 취미가 없지만, 정말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은 상하고, 풀 길 없는 상태에서 조금 이른 저녁을 먹게 되었다. 마침 인도음식점이 눈에 띄어 오랜만에 인도식카레를 먹기 위해 들어갔다. 우리 일행이 자리에 앉자마자 히잡(차도르는 분명 아니었음)을 머리에 두른 두 젊은 아랍여인이 우리 옆자리에 앉았다. 꽤 괜찮은 식당이었는데, 이 두 여자는 정말 공공의식이나 에티켓 자체가 교육이 안 된 것 같았다. 옆자리의 다른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의자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퍼질러 앉은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미 다른 사람이 주문을 하고 있음에도 높고 날카롭지만 굵고 크며 짜증 섞인 목소리(그런 모순된 목소리가 가능한 줄은 처음 알았다)로 “익스큐즈 미”를 외쳐대며(외치는 수준에 거의 근접한 듯한 큰 목소리) 옆자리의 주문을 방해했다. 영어도 잘 못하면서 인상을 잔뜩 쓰고, 낄낄거리며 자기네 말을 못 알아듣는 친절한 아르바이트 아가씨의 발음을 흉내내며 조롱했다. 급기야 또 다른 옆자리의 한국손님들은 견디지 못하고 조용히 퇴장.
주문한 내용도 좀 낯 뜨거운 수준이었다. 명동 그 한 가운데의 나름 괜찮은 레스토랑 4인석을 떡하니 둘이 차지하고 앉아서 인도식 샐러드 하나, 버터 난 하나, 그리고 콜라를 주문했다. 게다가 샐러드를 맛보더니 웩웩, 하며 소스를 달라고 했다. 여종업원은 이번에도 상냥하게 웃으며 갖다주었다. “이거 말고 그린색 메운 거!” 하더니 또 다시 조롱하며 키득키득.
여직원이 이번에는 “우린 매운 거라고는 이것 밖에 없다.”며 청고추를 갖다주었다. 그러자 '휴', 한숨을 내쉬더니 투덜투덜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식사는 하지도 않고 앉아 있더니, 다시 종업원을 부른다. 이번엔 포장을 해달라고 한다. 역시 이번에도 종업원은 포장하겠다고 다시 그 샐러드 접시를 주방으로 가지고 갔다. 그 이후로도 그 둘은 여러 차례 물 달라, 뭐 달라, 계속해서 불렀다. 그 두 여성들은 계산을 하기 위해 돈을 내는 마지막 단계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온갖 동전이란 동전은 죄다 모아 좌르르르, 책상 위에 쏟아놓고 세기 시작한다. 정말 한 십 분은 그렇게 세더니, 그 돈을 계산대에 주고는 또 다시 키득키득 웃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한 아르바이트 아가씨는 인상도 안 쓰고 세기 시작한다.
아! 중간에 핸드폰으로 자기네 아랍노래를 엄청 크게 틀어대어서 참다 참다 도무지 참을 수 없어 “시끄러우니 줄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줄이기는 했지만 영 불량스러운 태도였다. (나, 이래봬도 쬐금 무서운 언니다!), 종업원의 발음을 흉내내며 비웃는 상스런 외국 여자에게도 '손님은 왕'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안하무인같은 동물에 비유하기도 되려 미안할 자들도 손님이랍시고 오니까, 그건 아닐 것이다. 사람이 아닌 동물처럼 행동하면 똑같이는 아니어도 당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쯤으로는 반응해줘야 한다. 아르바이트생 아가씨가 너무 지나치게 웃으니 그 모습이 삐에로처럼 웃기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대신 내가 눈으로 째려줬지만, 오불관언이었겠지!)
물론 이는 우리 사회내부에 만연한 서비스직에 대한 ‘갑질 문화’와도 밀접히 관련된다. 그 아르바이트 아가씨는 그러한 내부적 모순에 길들여져 있기에 예민한 상황에서도 무비판적으로 견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외부와의 문제를 잘 해결하려면 먼저 내부문제부터 고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아무튼, 그런 수준 낮은 관광객을 보며, 유학시절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슬금슬금 줄서있는 틈을 비집고 새치기하는 한국아줌마들, 만원 지하철에서 타자마자 저쪽 멀리에 있는 빈 좌석을 발견하고는 휙 가방을 던져서 자리를 맡는 한국아줌마들. 그때는 정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창피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우리도 많이 바뀌었다. 한국을 방문하는 수많은 중국 관광객들의 행동을 보며 과거의 우리를 반성하고 그들을 이해해보려 노력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정말 남의 나라에 관광을 오는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처럼 이렇게 너무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과한 친절을 베풀어 조롱당하지 않기를, 또한 그들도 조금은 미안함과 조심스러움을 갖출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들의 문화에도 응당 있을 인간다움의 표현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 4․50대 이상의 한국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다른 문화권에 속하여 그 장점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상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매 끼니를 다 대접하는 것을 의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우리 집에 온 손님인데 어떻게 밥을 안 먹이냐는, 접빈객(接賓客)의 전통을 강조하는 생각이다. 나는 그 문제로 가끔 충돌이 생기기도 한다. 그냥 그들처럼 한두 번 친절을 베풀면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인 것이다. 역으로 그 호의가 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 또한 생각해보자. 그들만큼만, 아니면 한 번의 성의를 더 추가하는 정도가 어떨까?
간혹 대접받기 위해 대접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또한 있는데, 그런 분들은 정작 그 나라에 가서 대접받지 못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대접해 달라고 했나? 물론 단순관광이 아니면 미묘한 문제들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개재하고 고려할 변수들도 달라지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어떻게 보아도 지나치게 대접하는 경우는 역시 이해하기 힘들게 마련이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들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친절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방식 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친절의 방식’ 자체가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문화를 알아야 우리도 우리를 찾아온 손님들을 정중한 존재들로 기분좋게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박소현 중랑아트센터 관장
현 중랑구립 중랑아트센터 관장, 서울시립대 겸임교수.
빠리8대학 조형예술학 박사수료.
20년간 빠리유학을 마치고 빠리 중심의 마레지역에서 10년간 갤러리 운영.
귀국 후 현재 문화예술정책을 비롯하여 각 지역에 문화예술의 옷을 입히는 일을 하고 있음.
<중랑아트센터 소개>
서울시 중랑구에서 설립한 지역공공미술관이다. 전시공간 순면적이 900평 정도이며 망우역, 상봉역 등 전철역에 바로 인접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작년 5월 재개관하여 1년 남짓 지난 기간 동안 단기간에 세계수준의 작가와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성장하였다
※ 본 칼럼은 당사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정리 권기정 기자 john@tt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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