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리뷰] 뿌리 깊은 나무- 스물여덟 글자에 담은 愛民
2016-03-23 13:19:57 | 박명철 칼럼니스트

<육룡이 나르샤>는 <뿌리 깊은 나무>를 복기하는 듯 끝을 맺었다. 역시나 한글 창제와 반포에 방점을 찍었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SBS드라마, 24부작, 2011년, 장태유 연출, 김영현 극본, 한석규 장혁 신세경 주연 의 명장면 하나는, 세종을 암살하기 위해 살아가는 똘복이가 한글의 위대함에 무릎 꿇는 장면이다.


▲SBS <뿌리 깊은 나무> 영상 중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이 똘복에게, 아버지가 새로운 글자를 만들고 있으며 이는 백성들에게 큰 유익이 될 것이고 말하자, 똘복이는 오히려 그 말을 비웃으며 어리석은 양반들의 세계를 힐난한다.


“그 글자가 나오면 백성들이 정말 글자를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양반님들이야 공부가 일이시니까 5만 자나 되는 한자를 줄줄 외우시겠지요? 네, 저도 한 천 자쯤은 압니다. 그런데 제가 그거 배우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십니까? 제가 머리가 나빠서요? 아닙니다, 시간이 없어서입니다. 그게 백성들의 삶입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아침에 동 트기 전에 일어나서 해질 때까지 일만 해야 되는데, 언제 글자를 배운다 이 말입니까?”

맞는 말이었다. 한글을 만나기 전 한자만을 배우며 살아온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그러했다. 그러나 똘복이의 말에 광평대군도 지지 않을 기세다. 숨 막히는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진다.


▲SBS <뿌리 깊은 나무> 영상 중

 

“아직 새로운 글자를 배워보지도 않았지 않느냐. 할 수 있다.”

“5만 자 중에 천 자 배우는 데도 그렇게 오래 걸렸습니다. 배워요? 도대체 전하의 글자는 몇 자나 됩니까? 5천 자요? 아니면 3천 자? 아니면 천 자요?”

“스물여덟 자.”

“천…스물여덟 자요?”

“아니 그냥 스물…여덟…자!”

 

​(똘복이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장난을 치느냐는 투로 말한다.)


“그게 말이 됩니까? 이 헛간 안에 있는 물건만도 스물여덟 개는 넘습니다. 그런데 글자는 천하를 다 담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고작 스물여덟 자로 만 가지 2만 가지 다 담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만 가지 2만 가지가 아니다. 3만 가지 백만 가지도 담을 수 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똘복이의 어릴 적 정인 다미, 아니 세종의 마음을 담아 한글 창제를 도와온 다미가 광평대군을 거든다. 다미는 하얀 치마를 찢어서 똘복이 앞에다 펼친 뒤 스물여덟 글자를 쓴다.)


“이거야. 이것만 외우면 돼. 이 스물여덟 자만 알면 한자로 쓰지 못하는 우리 이름, 오라버니가 잘 하는 욕, 사투리, 우리 마음, 바람소리, 새소리, 이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다 담을 수 있어.”


세 사람의 대사가 흐르는 동안 나는 갑자기 먹먹해졌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인데, 내 나라 글자의 수 ‘스물여덟’의 위대함, 스물여덟 자보다 더 많으면 안 되는 까닭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글자라면 당연히 세상에 존재하는 천하 만물의 숫자만큼 존재해야 한다는, 흔들리지 않는 생각을 깨뜨리고, 스물여덟 글자로써 모든 말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한 그 위대한 발상, 거기다 동 트기 전에 일어나 해질 때까지 일해야만 비로소 입에 풀칠이라도 하는 백성들을 위해, 그들이 글자를 깨치기 위해선 절대 넘어선 안 될 스물여덟이란 숫자의 의미를….


▲SBS <뿌리 깊은 나무> 영상 중


그래서이다. 한글은 백성을 제 피붙이처럼 진심으로 사랑한 한 군주의 마음이 똘똘 뭉쳐서 생겨난 결정체였다.


다미의 말처럼 똘복이는 반나절 만에 한글을 깨친다. 세종의 한글을 깨친 첫 백성으로 드라마가 그려낸 인물인 셈이었다. 한글을 마당에 그리는 둥 쓰는 둥 하면서 똘복이는 충격에 휩싸인다. 이게 정말 가능한 거야? 모두가 글을 쓰는 세상이 올 수도 있는 건가? 다미가 똘복이가 마당 쓴 글자를 읽는다.


“나는 다미를 만났다 아부지 보고 싶다….”

“이게 맞아? 진짜 이게 맞아?”

“오라버니는 다 배운 거야. 반나절 만에.”

“우리가 쓰는 말…응? 진짜 우리 입으로 쓰는 말들을 다 쓸 수가 있는 거야? 정말 다?”

“이미 썼잖아.”

 


땅바닥에 쓴 똘복이의 한글은 곧 똘복이의 마음 중심에 새겨둔 그리움이었다. 내 마음 저 깊은 데 담아둔 그리움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읽어냈을 때 똘복이는 비로소 글자의 가치에 눈을 떴다.
드라마가 조금 더 흘러가면 세종이 훈민정음 서문을 기록하는 장면에 이른다.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서로 잘 통하지 않거늘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세종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반포하는 날까지도 세종은 훈민정음 서문을 못 다 쓴다. 그리고 마침내 용기를 내어 쓴 그 다음 문장은 이렇다.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백성들이 날마다 쉽게 익혀 편안하게 쓰도록 하려는 마음일 뿐이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무엇보다 이 한 마디에 주목하는 드라마인 셈이다.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 그러니까 세종의 마음 저 밑으로 이 마음이 흘렀고, 여기서 한글이 탄생했던 것이다. 세종의 그 많은 ‘업적’들이 귀하고 고마운 까닭은 거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서이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의 아픔을 공감한 임금으로서 꼭 지어야 할 아름다운 집이 한글이었다.


백성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는” 이 마음이야말로 신하들이 반대하고, 심지어 백성들조차 의심한 길을 흐트러짐 없이 갈 수 있었던 까닭이다. 성군의 자격은 무엇보다 이 마음을 가졌는지, 버렸는지에 달렸다.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군주의 마음, 그 마음을 가진 임금은 만백성들이 태평성대를 살아가는 시간에도 자신만은 지옥을 살아야 했다. 아무리 보듬어도 늘 고단하고 아픈 백성이 있게 마련이고, 그런 백성이 있는 한 임금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여기서 세종의 싸움은 시작했다. 어떤 반대와 걸림돌도 피하지 않고 맞섰다. 대국의 간섭과 압박, 집권세력의 사상, 신분제도, 그 모든 현실이 세종에겐 적이었고, 넘어야 할 벽이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아름다운 집으로 지어가는 근본적인 동력이다. 그 마음이 하늘의 마음인 까닭이고, 그 마음에 닿음으로써 비로소 세상은 길을 찾는다.


그래서이다. 누군가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성직자가 되려는 사람도, 심지어 운동선수가 되고, 상품 하나를 만들더라도, 기업을 경영하거나, 교육을 하거나, 한 가정을 꾸리고자 하더라도, 무엇보다 먼저 살펴야 하는 마음이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박명철 칼럼니스트
 

▶박명철 칼럼니스트는…

책,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들을 소재로 하여 밥을 짓듯 글을 짓는 문화콘텐츠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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