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 기행(5) 용장 한니발의 숨결 - 비르사 (Byrsa) 언덕
2016-09-26 19:17:17 | 권기정 기자

1.5 용장 한니발의 숨결 - 비르사 (Byrsa) 언덕

 

 

내가 어렸을적 - 초등학교 시절, 아마도 3-4학년으로 기억하는데 책읽기가 무척 재미있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나이지만 엄청난 지식 욕구에 독서열을 불태웠을 시절이 있었다. 당시 50권짜리 어린이 문학전집(중간에 칼라 삽화가 들어갔던)을 가진 친구들이 거의 없었는데, 마침 옆 반에 그 전집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의 로망이었던 중국 요리집 아들이었는데, 당시 레고 장난감도 가지고 있어서 또래들의 인기를 독차지 했던 미소년이었다. 개구진 남자녀석들은 그 집에 레고 장난감을 하러, 때로는 동화책을 보려고 그 친구 집에 자주 놀러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때 만큼 책에 파묻혀 있던 때가 없었는데, 사실은 그 집에 가면 친구 어머님이 친하게 지내라고 자장면을 공짜로 주었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당시 읽었던 책 중에서 기억나는 것이 플루타크 영웅전, 수호지, 알렉산더 대왕과 한니발 장군의 이야기였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남자라면 이렇게 되어야 해’ 라는 영웅들의 무용담은 그들을 동경하게 만들었고, ‘넌 커서 뭐가 될래?’ 하고 물으면 ‘장군이요’, ‘대통령이요’ 하고 말하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남자애들은 장난감 총과 나무칼을 가지고 전쟁놀이에 몰입하고 있었을 때니, 남자애들의 극성스러움이란 엄마들의 공통된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어렴픗한 기억으로도 이름이 조금은 어려웠던 스파르타와 카르타고를 구별하지 못해 두 나라가 같은 나라였다고 믿고 있었다. 지금도 구별이 잘 안가는 것은 마찬가지긴 하지만, 어른들이 외국 배우 나오는 영화를 보면 그 배우가 그 배우 같아서 구별이 안가 외국영화를 잘 안보게 된다는 말씀이 이해가 간다.

 

 

처음 한니발을 안지 30여년이 지난 후 이렇게 만나는 튀니지는 새롭게 다가온다. 튀니지의 카르타고는 다큐멘터리와 책으로 미리 만났어도, 지금 이곳 카르타고 유적지에서의 감격은 말로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가슴에 생생하게 다가온다. 내가 어떤 글로 표현해도 다 전하지 못할 만큼 많은 이야기를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전해주고 있다. 카르타고의 비르사 언덕을 올라가며 혹 한니발의 흔적이 있을지 찾아본다. 흰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에는 구름사이로 빛 내림이 보인다. 마치 어렸을 적 나에게 감동을 주었던 주인공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은 이렇게 환영을 해주는 것 같다. 한니발 장군은 내가 오랜 시간 후에 튀니지를 찾아오기까지 오랜 기다림을 참아주었나 보다.

 

지금 비르사 언덕에 서 있을 때, 마치 어렸을 적에 느꼈던 그 미세한 감동이 지금도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예전의 느낌을 다시 찾을 수 있다니 말이다. 튀니지에 오기 전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두 번째 책의 제목이 한니발 전쟁이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자마(Zama) 대회전의 장소를 가보고 싶었는데, 이곳에서 동행한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나중에 튀니스에서 카이로우안 쪽으로 이동하는 길에 보이는 넓다란 평원이 ‘자마 평원’일 것이라고 했다. 이곳에서도 자마 대회전이 있었던 곳은 그저 추측으로 알 뿐이다.

 

한니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비르사(Byrsa) 언덕에 오른다. 지금은 그저 파괴되어진 유적지에 불과하지만 불출의 명장 한니발은 지금 여기 살아있는 것 같다. 세인트 루이스 성당 오른쪽, 햇살이 반사되는 눈부신 지중해를 배경으로 쇠락한 돌기둥과 돌 벽만 남은 카르타고의 옛 유적지가 펼쳐져 있다. 오랜 시간동안 하늘과 바람과 비에 씻겨버린 흔적들, 폐허 아래로 보이는 옥색 바다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했나 지중해의 승자였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흔적만, 2,000여년 전의(기원전 146년)에 불타버린 도시의 허전함이 밀려온다. 유적지 주변을 걸으면서 한 번, 두 번 심호흡을 해본다. 팔을 펴고 고개를 들어본다. 하늘이 보인다. 한여름의 지중해의 눈부신 햇살은 모든 것을 강렬한 색의 대비로 만들어버린다. 그 대비 속에서 마침내 내가 만나고 싶었던 그 곳, 한니발의 도시에 온 것이다.

 

튀니스에서 비르사 언덕으로 가는 방법 중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는 것의 하나는 TGM 기차 (TGM, Tunis-Goulette-Marsa 간의 기차 )이다. 덜컹거리는 기차를 타고 '카르타고 한니발 역'으로 가면 된다. 관광객들은 역에서 내려 언덕을 향해 천천히 걸어온다. 역사 속의 ‘한니발’은 그동안의 영욕의 세월을 작은 역 이름으로나마 보상받는 듯하다. 역 앞으로 나오면 자그마한 기념품 가게가 있다. 여기에 검은 돌로 만든 한니발의 두상을 팔고 있다. 한니발은 지금도 그렇게 이곳에 살아있다.

 

 

이 지역은 휴양지를 끼고 있는 고급 주택지라 넓고 깨끗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가장 높은 '비르사 언덕'(Byrsa Hill)은 로만 카르타고의 유적지군으로, 멀리서도 잘보이는 둥근 지붕의 세인트 루이스 성당은 로마시대의 유적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인 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146년)에서 당시 카르타고를 포위한 로마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도시를 건설할 때 자연 방수물질인 역청을 사용한 도시가 파괴되면서, 불붙은 화재에 무려 17일 밤낮으로 불탔다고 전해진다. 역청은 노아의 방주 때부터 방수 물질로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사용된 물질이고, 인화성이 매우 강하다.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니 당연 도시는 훨훨 잘 탈 수 밖에. 그리고 나서 로마는 보복으로 파괴된 도시에 풀 한 포기도 자라지 못하도록 소금을 몇 겹이나 뿌렸으니 말이다.

 

로마는 카르타고라면 두렵기도 하고 이를 갈아 주민이 살지 않는 지역으로 만들었지만 지중해 무역과 군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다시 카르타고 자리에 도시를 건설하였다. 분명 카르타고에 소금을 뿌린 것을 후회했을 것이다. 나중에 지진이 일어나 건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고, 지금 보는 대부분의 유적지는 지진으로 무너진 로마 도시의 흔적들이다. 로마는 항구를 중심으로 도시계획을 하여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포럼(Forum)이라 불리는 언덕 위에는 신전 같은 공공건물을 짓고 아래쪽에는 주택지를 만들었고, 바닷가에는 항구를 만들었다. 지금도 로마시대 때 만든 항구의 모습이 남아 있다. 로마가 본격적으로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튀니지에서 였다. 페니키아의 카르타고와 리비아는 멸망하고 그 대신 로마가 지배하는 아프리카가 탄생했다. 북부 튀니지는 고대 세계의 곡창이며, 올리브기름의 주산지였다. 그곳에서는 올리브유를 이탈리아보다도 더 많이 생산했으며 이런 추세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세계 3위의 올리브 생산을 자랑하고 있으니 튀니지의 올리브가 얼마나 많이 생산되었을지 짐작이 간다.

 

로마인들은 교량, 댐, 수로 및 관계시설은 물론이요 수천 킬로미터의 도로도 건설했다. 현대 모로코에 해당하는 볼루 빌리스에서 리비아의 렙티스 마그나에 이르는 600개 도시를 그물처럼 연결하는 조밀한 도로와 수로를 통해 로마는 식민지 건설을 완성했다. 지금도 스페인에서는 로마시대에 건설하였던 수로를 파이프를 연결해서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었다.

 

카르타고에 도시를 세운 최초의 민족은 페니키아인들이라고 한다. 지금의 레바논에 근거지를 둔 이 사람들은 기원전 814년경 튀로스를 모시(母市)하여 도시를 건설되었다. 이 해안과 인근의 초원에서부터 천 년동안 셈족 문명이 시작된 것이었다. 동부 지중해에서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달콤한 포도와 올리브의 재배법을 도입한 사람들도 바로 카르타고의 페니키아인들이었으며, 그들 고유의 문자인 페니키아 문자(알파벳의 시조)를 사용하여 기록에 남겼다. 이것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과 동시에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를 건설한 카르타고의 힘이었고 또한 이들은 식민지를 용이하게 관리하기 위해 삼면에 바다를 낀 좁고 험준한 벼랑 꼭대기에 카르타고를 건설한 것이다. 카르타고란 이름은 셈족인 페니키아어로 ‘새로운 도시’를 뜻하는 '카르트 하드샤트(Kart-Hadasht) 에서 유래하였는데 나중에 로마인들에 의해 '카르타고'로 와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포에니(Punic)'는 페니키아를 가리키는 라틴어이다.

 

당시 카르타고는 지중해의 광물교역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화무백일홍(花無百日紅) 이라 했던가 승승장구하던 카르타고의 무역독점은 BC 6세기 이후 수세에 몰리게 되면서 BC 146년 로마군의 승리로 그 역사를 끝맺었다. 그래서 무참히 파괴된 카르타고 관련 기록들중 지금 남아있는 것은 그리스인·로마인 저작가의 저술 뿐이다. 따라서 카르타고에 대한 것은 승리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관점이라 불분명한 점과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토펫 신전의 인신공양 역시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보는 것이다.

 

 

불새출의 영웅 한니발과 카르타고

 

신라 청해진의 장보고 같이 해상 무역권을 장악해 막대한 부를 거둬들이던 고대도시 카르타고는 새로운 혜성같이 떠오르는 로마와의 세 차례에 걸쳐 치러진 ‘포에니(Poeni) 전쟁’ 으로 그 수명이 다한다. - 포에니 전쟁은 때로는 한니발의 이름을 따 ‘한니발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역시 삼세판 이었던가 유명한 ‘칸나에(Cannae) 전투’를 포함해, 카르타고는 세 번째 전쟁에서 결국 로마군에게 함락되어 불태워지고 만다.

로마 역시 상대적으로 본국과 거리가 멀었던 이 지역에서 흥망성쇄를 거듭하다가 반달족에게 굴욕을 당하고 만다. 카르타고 점령이후 570여년이 지난 425년의 일이다. 마치 아프카니스탄 탈레반 정권이 바미얀 석불을 파괴했듯이 반달족은 로마인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신상의 머리를 죄다 날려버렸다. 그래서 머리가 없는 조각상들이 이곳에 많은 이유가 그 때문이다. '반달'이라는 이름은 오늘날 문화와 예술의 파괴 행위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 '반달리즘(vandalism)'의 어원이지만, 북아프리카에서 반달족이 저지른 파괴 행위가 실제로는 생각보다 훨씬 적다. 그들은 올리브나무나 포도나무덩굴은 그들에게도 필요했기에 훼손하지 않았는데, 반달족에 이어 당도했던 비잔틴 정복자들이 이 점을 증언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농업생산을 위한 경작은 문명의 바탕이었고, 반달족도 먹고 살아야 했기에 그것을 파괴했다기보다 오히려 지속시켰다.

 

 

카르타고 국립고고학박물관(Musee de Carthage)에는 당시의 사료와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야외 전시장의 집터에는 볼링공만한 커다란 돌로 만든 투석용 포탄들이 놓여 있어, 격렬했던 전쟁의 흔적을 짐작케 한다. 전시실에 보면 당시에 사용하던 토기들과 생활도구들, 어린이가 사용했음직한 조그만 새를 닮은 토기나 이집트 스핑크스 모양의 토기 주전자 등 당시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전시물들이 있다.

 

박물관에서 나와 고대 원형극장으로 가본다. 박물관 앞에 전시된 포스터에서는 이곳에서 뮤직 페스티벌이 열린다고 홍보를 하고 있다. 이런 멋드러진 유적지에서 행사를 벌이는 그들의 수준이 부럽기만 하다. 돌로 만들었으니 화재의 위험에서도 안전하다. 우리같이 목조건물이 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돌로 만든 튼튼한 건축물들이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지어진지 1,800년 가까이 된 이 원형극장은 최대 1만여 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한다. 지금은 건물 한쪽이 무너져 오천여명 정도만 수용한다 하니 로마인들의 건축기술은 대단하다. 시간이 있다면 이곳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여하고 싶은데 시간이 원수일세. 한여름밤에 한니발과 같이 하는 축제, 참 기대되는 구경거리 일 듯 싶다.

 

카르타고와 ‘살람보’(Salammbo)

 

카르타고에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다가 프랑스의 소설가 구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가 ‘살람보’라는 소설을 쓴 것을 알게 되었다. 《보바리 부인》과 함께 플로베르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프랑스 문학 중에서 역사소설로나 서사시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이 현재라는 시간에서 좀 벗어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라고 이 소설을 쓴 이유를 말하는데 낭만주의자였던 플로베르는 단지 몇줄만 남아있는 역사를 기반으로, 우리가 모르는 어떤 문명을 부활시키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주빛 그 어떤 것’이라고 부른 소설 살람보를 완성하기 위해 2개월 동안 튀니지를 여행하며 자료를 수집했는데, 여행중에 잠시 머물렀던 튀니지 동남부의 제르바 섬을 두고 “제르바를 두고 죽기가 억울하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살람보의 줄거리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뒤(BC 241) 체불된 임금에 불만을 품은 용병들이 카르타고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군의 대장 마토는 카르타고의 수호신인 여신 타니트의 신비로운 베일을 빼앗아 가버리고, 여신이 더럽혀진 카르타고의 운명은 위태로운 상황. 이때 여신 타니트를 섬기는 최고 집정관의 딸이자 무녀인 ‘살람보’는 마토의 진영으로 가서, 자기의 순결을 희생하면서 그 베일을 돌려받는다. 다시 운명은 뒤바뀌어, 반란군인 용병 부대는 협곡에 갇힌 채 괴멸되고 마토는 사로잡혀 처형되는데, 남몰래 마토를 사랑했던 살람보도 절망 끝에 죽는다는 내용이다. (네이버 참조)

 

보봐르 부인을 쓴 플로베르 다운 내용구성이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지 5년이 지나 완성된 소설 살람보는 제 1차 포에니 전쟁 직후 카르타고를 위해 싸웠던 용병들이 일으킨 반란과 그 진압과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최고 집정관 딸인 살람보와 반란군 지도자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렸다. 참 상상력도 대단하다. 전에 가이드가 무슨 소설 이야기를 하던 것 같던데 바로 소설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공주와 신전의 여자 이야기를 했는데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는데 지금에서야 기억이 난다. 아! 이놈의 기억력...

 

가격

(시디 부 사이드에서 카르타고 까지 0.425 디나르, 카르타고에서 튀니스까지 0.650 디나르)

유적 입장료 : 7 디나르 / 사진 : 1 디나르

 

- 입장권 하나를 구입하면 로마시대의 유적지가 포함된 8군데의 카르타고 유적을 둘러볼 수 있다.

 

** 1차 포에니 전쟁

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년)은, 명목상 로마의 시민이었던 시칠리아의 이탈리아인들이 시라쿠사의 그리스인들과 싸우기 위해 로마와 카르타고에 원조를 요청한 데서 발단했다. 로마와 카르타고 양측은 각각 상대방이 이 요청을 시칠리아 정복의 구실로 삼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충돌하게 되었다. 1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는 최초로 중요한 군사적 해외 진출을 했으며, 승전한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과중한 전쟁 배상금을 부과했다.

 

** '칸나에 전투(Battle of Cannae)’

'칸나에 전투(Battle of Cannae)’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남부 이탈리아 칸나에 평원에서 로마군과 카르타고군 사이에 벌어진 세계 대전사에 남을 유명한 전투다.

한니발 군대는 스페인의 영토를 점령한 후 사군툼(Saguntum, 고대에 자킨토스섬에서 온 이주민이 건설한 도시로, 오랫동안 사군툼이라 하였다. 지금의 스페인의 사군토)이라는 카르타고 기지에서 피레네 산과 알프스를 넘고 로마의 숨통을 조이면서 "나의 목표는 로마다! 쓸데없이 도중에 군사를 잃지는 않겠다." 라고 선언하고 알프스를 넘어온다. 이 싸움은 삼국지에 나오는 모사 정욱의 십면매복계(十面埋伏計)와 유사한 포위·섬멸전의 교과서적 전형으로 한니발이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은 5만 병력으로 8만 명에 달하는 로마군을 완벽하게 포위해 궤멸시켰다.

 

당시 로마군 사령관은 집정관이었던 테렌티우스 바로였는데, 그는 우세한 병력을 바탕으로 로마군의 주력인 중장보병을 사각 밀집 대형으로 평원의 중앙에 배치하는 정공법을 택했고 반대로 한니발은 경보병으로 구성된 주력부대로 적군을 유인하여 끌어들인 후 좌우 양군이 적을 포위해서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하여 승리하였다.

좌우익 기병과 정면 보병으로 로마군을 포위한 카르타고군은 절반 밖에 안되는 군사력으로 우왕좌왕하는 로마의 대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7만 명이 전사했고 숙영지 보호를 위해 남겨뒀던 예비병력 1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사령관인 바로는 호위병 몇 명과 함께 가까스로 달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 자마 대회전(Battle of Zama)

 

B.C. 202년 카르타고에서 40km 떨어진 자마(Zama) 평원에서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결전이 벌어졌다.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은 2만이 전사하고 한니발은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한니발은 원로원을 소집하고 강화 조약을 체결하라고 권고했다. B.C. 201년 카르타고는 아프리카 밖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누미디아의 독립과 누미디아와 로마의 동맹을 승인하고 로마의 허락없이는 전쟁을 벌이지 않으며 1만 탈렌툼의 배상금을 50년 동안 갚는다는 조건으로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스키피오는 로마에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하고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권기정 기자  john@tt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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