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가을 여행지로 그만
옛날과 현대, 고즈넉함과 다이내믹이 공존하는 곳
볼거리, 먹거리, 체험거리 통해 좋은 추억 만드는 행복한 시간
2019-10-16 17:06:53 , 수정 : 2019-10-16 22:13:12 | 이상인 선임기자

[티티엘뉴스] 가을에 잘 어울리는 남도의 맛 기행을 떠나보자

 


▲담양 소쇄원에서 '소쇄원을 거닐다'란 프로그램에 참가한 관광객들이 소쇄원의 아름다운 계곡에서 거문고 연주를 듣고 있는 모습


아름다운 계절 가을에는 국내여행이 그만이다. 많은 지역 중 어디로 갈까 고민이 된다면, 단연 전국의 10개 권역을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로 육성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진행하고 있는 국내여행 활성화 사업인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이 답이다. 특히, 한국관광공사가 추진하는 사업이라고 하니 더욱 믿음과 신뢰가 간다.  

 


▲대한민국 테마10선을 알리는 포스터


볼거리, 먹거리, 체험거리가 테마에 맞게 잘 어울려져 있는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은 각 권역에 있는 3~4개 지방자치단체가 지역의 특색 있는 관광명소들을 개선하고 연계하여 테마가 있는 고품격 관광코스로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8권역을 총괄하고 있는 전고필 PM이 전하는 전라도만의 웅숭깊은 맛의 풍미가 있는 8권역 
 


▲대한민국 테마10선 8권역을 총괄하고 있는 전고필 PM이 8권역 관광발전을 위해 오늘도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듯 고뇌에 찬 모습을 보이고 있다


먼저 8권역을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로 육성·발전시키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전고필 PM은 남도맛기행 권역인 광주, 목포, 담양, 나주의 8권역은 영산강을 따라 형성된 전라도만의 웅숭깊은 맛의 풍미를 남도의 자연과 문화와 함께 발굴하고 즐겨 보는 테마라고 8권역을 쉽게 요약했다.  

 

 
▲담양 소쇄원의 아름다운 모습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편안한 여행을 위해 여행지 곳곳에 여행자 쉼터 및 여행정보를 제공하는 여행자 플랫폼 조성사업과 지역의 관광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남도 투어랩을 통한 사업자 양성과 지원 사업이 있다며, 맛있는 여행을 위해 8권역의 지역을 당일에서 2박 3일까지 여행할 수 있는 남도 관광 테마기행도 마련되어 있어 국내외 관광객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나주 목사내아의 모습


전고필 PM은 역사자원이나 문화자원, 특히 맛에 있어서 본향과 같은 곳이 바로 8권역이라며, 맛의 고장으로써 나주, 목포, 담양, 광주 등은 전혀 손색이 없는 유명한 맛집들이 각 지역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고 말했다. 담양에는 떡갈비, 대통밥, 막걸리, 쌀엿 등이 유명하고, 나주는 곰탕, 육회비빔밥, 오리탕, 장어구이 등이 굉장히 유명하며 옛날부터 나주는 호남의 수도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어팔진미, 소팔진미라고 해서 여덟 가지의 물고기와 여덟 가지의 채소가 유명했던 곳으로써 지금도 그 전통들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나주 금성관의 모습


목포는 해산물이 풍부해서 낚지, 민어, 병어, 갈치, 아구 등 아홉 가지의 해산물이 유명한 구미(九味)의 고장이라 할 수 있으며, 최근 호텔 델루나의 촬영지로 목포근대역사박물관과 해상케이블카가 유명세를 타면서 먹거리뿐만 아니라 관광의 매력까지 넘치는 곳으로 널리 알리고 있다고 밝혔다.  
 


▲나주 금성관 앞에 있는 나주의 대표 먹거리 나주곰탕집의 모습


광주는 현재 전라도의 중심지로 전라도의 맛있는 음식이 전부 다 모여 있는 곳인데 송정리의 떡갈비, 남도의 한정식, 광주의 김치와 주먹밥 등이 유명하다고 말했다. 맛에 있어서 8권역이 가지고 있는 강점들은 전국 어느 곳 보다도 빼어나고, 또 문화적 자산으로써 8권역은 담양 같은 경우 소쇄원이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민간 정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죽록원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대나무 공원을 가지고 있고, 가로수 길이 아름다운 메타스퀘어 길도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담양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국내 최장 목포 해상케이블카의 운행 모습


또한, 추월산과 담양호에는 아름다운 산과 호수를 품은 용마루길이라는 탐방로가 조성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애호하고 있다. 광주에는 광주호수생태원이란 자연 형태로 생겨난 습지 위에 황지해 작가가 개설해 만든 영국에서도 그 우수성이 드러난  DMZ, 금지된 정원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정원과 해우소라는 정원, 그리고 탐방로가 있어 많은 탐방객들이 편하게 쉬면서 사색하는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광주호 호수생태원에 있는 황지해 작가의 작품인 우리나라 전통 화장실인 해우소의 모습


광주시내로 들어서면, 양림동이라는 아주 오래된 역사와 근대 역사가 함께 섞인 마을이 있다. 거기는 이장우 가옥, 최승효 가옥 등의 고택들이 광주의 주거양식들을 알 수 있게끔 하며, 선교사들이 최초로 광주에 들어와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고, 의료 활동을 했던 곳이 바로 양림동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빈슨 기념관을 비롯해 여러 개의 기념관과 더불어 3개의 양림교회와 선교사들의 묘역 등이 자리하고 있다. 

 


▲목포 근대역사관 앞 도로에 있는 국도시발점인 도로원표의 모습


무엇보다 팽귄마을이라고 해서 마을 어르신들이 십시일반 마음을 모아서 만든 생활소품과 아기자기한 작품들이 많은 곳으로 관광객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나주에는 남도의 작은 한양이라고 불릴 정도로 굉장히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금성관이라든지 목사내아, 정수루 등 오래된 관아 유적을 가지고 있고, 천연염색을 할 수 있는 천연염색박물관을 가지고 있다. 또 영산포하면, 홍어가 유명한데 내륙에 하나밖에 없는 강등재와 홍어거리가 있다고 밝혔다. 

 


▲목포 근대사역사박물관 1관


전 PM은 목포로 내려가면 1897년 개항 이래 각국의 조개지가 되면서 일제의 침탈하면서 남겼던 불우한 역사들이 남아 있다면서, 근대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옛날 목포 영사관의 경우는 일본이 계획적으로 수탈했던 역사들을 다시 상기해 볼 수 있고, 또 일본식의 절이 현대에는 문화회관으로 쓰이고 있는 동본원사 건물들도 남아 있다.  

 


▲목포 근대사박물관 1관 뒤에 있는 일제시대 당시 만든 방공호의 모습


다음으로 동양척식회사 건물이 근대역사 2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매주 토요일이면 비밀스럽게 문을 여는 이훈동 정원도 있으며, 전장 3.23Km에 달하는 목포해상케이블카가 지난달 9일 개통됐는데 노을이 질 때 해상케이블카를 타면 정말 아름다운 서남해안의 야경에 푹 빠질 수 있다고 밝혔다. 

 


▲목포 앞 바다를 가로 지르는 해상케이블카의 모습


전 PM은 목포에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갓바위이라며, 풍찬노숙과 해식작용으로 마치 사호정처럼 바위를 빚어낸 모습이 아름답고, 그 옆에는 해상공원이 있는데 그 해상공원에서는 춤추는 바다 분수쇼를 매일 저녁 진행하고 있다며, 이런 매력 있는 테마여행 10선 8권역에 꼭 한번 오셔서 즐겁고 신나는 관광과 함께 좋은 추억 많이 만드는 행복한 시간되시기 바란다며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의 개략적인 설명을 마쳤다.    

 


▲명하 쪽염색마을에서 체험자들이 쪽염색 체험 후 건조하기 위해 빨래줄에 널고 있다
 



전라도 광주, 목포, 담양, 나주의 관광지를 테마로 엮어 만든 8권역 남도맛기행에는

과연 어떤 볼거리, 먹거리, 체험거리가 있는지,

옛날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고 있고, 고즈넉하면서도 다이내믹한 특별함이 가득한 8권역,

모든 계절에 다 잘 어울리지만

특히 가을에 더욱 돋보이는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남도맛기행 8권역으로

본격 떠나보자.


 


#나주가 천년고도 목사 고을임을 알리는 나주 목(牧)문화관


▲나주목문화관 전경


나주목문화관은 나주가 천년고도 목사고을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지난 2006년 10월 19일 옛 금남동사무소를 개조해 만든 전시관이다. 이곳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큰 고을에 두었던 지방행정단위인 목과 선정을 베풀었던 나주 목사와 그의 하루일정 등을 살펴볼 수 있게 꾸며 놓았다.  

 


▲나주목문화관 정문에 있는 금성별곡 1장의 모습


전시관은 ▷어향 나주목이 되다. ▷나주목사 부임행차, ▷나주읍성 돌아보기, ▷관아 둘러보기, ▷다시 태어나는 나주 등 8개의 주제로 각종 조형불과 사진,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전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주목문화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역사자료 들


문화관에 들어서면, 금성별곡 제1장이 눈에 들어온다. 금성별곡은 1480년 성종 11년 나주향교 교수로 재임 중이던 박성건이 향교에서 공부하던 생도 10명이 생원, 진사과에 급제한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지었던 글로 경기체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나주목문화관에 전시된 대동여지도로 본 나주


모두 6장으로 나주의 산천과 인물이 빼어남, 향교 유생의 공부 모습, 당시 목사 김춘경과 통판 오한의 선정, 급제한 10인의 모습, 축하연 모습 등을 담고 있다. 

 


▲나주목문화관에 전시되어 있는 나주 정렬사 사진


우측으로 들어서면, 나주목사 행사 모습이 축소, 재현되어 있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나오는 관찰사 행차를 참고해 만든 나주목사행차 재현 모습은 나주 삼현육각의 연주 속에 근무하던 관원들이 모두 나와 함께 한 것으로 지금 봐도 그 대단한 위용을 짐작케 한다.

 


▲나주목문화관에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는 나주 옛 모습


이외에도 나주목의 탄생과 나주목의 변천사 등이 전시되어 있고 나주읍성과 나주관아에 대한 모습도 전시되어 있어 옛 나주의 모습과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육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외국사신 또는 정부 관리의 연회장, 금성관


▲나주 금성관의 외삼문, 3칸 규모의 2층 문루로 되어 있다


금성관은 나주목문화관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조선 성종 6년부터 10년인 1475년부터 1479년에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운 객사 건물로 왕과 왕비에 대한 예를 올리는 충성의 공간이자, 외국사신이나 정부고관의 행차가 있을 때 연회를 열었던 곳.

 


▲금성관 내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각종 공적비 등을 모아 놓았다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며,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칸의 넓이와 높이가 커서 위엄을 느끼게 한다. 

 


▲나주 금성관의 모습. 가운데가 금성관 본관이며 우측이 동익헌, 좌측이 서익현


왕의 공간이기 때문에 3도 3문이 있다. 3도의 가운데 길은 왕만이 걷는 길이며, 왼쪽은 문관과 지위가 높은 고관이, 오른쪽은 무관과 일반 백성들이 걷는 길이다. 3문 중 현재 내삼문은 소실되어 없고, 금성관 내 왕의 공간도 텅 빈 상태로 있다.

 


▲금성관 동익헌의 모습


나주 금성관은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이며,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 그 규모도 웅장하다. 일제 강점기에 군청 청사로 사용하며 크게 훼손됐던 금성관은 1976년 복원됐다. 1995년 다시 복원의 과정을 거치면서, 2005년 금성산 쪽으로 잇댄 서익헌, 2009년에는 동익헌이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나주 금성관 본관에 있는 현판의 모습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천일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며,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도 이곳에서 명성왕후의 상여를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했다. 광주학생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나주역과 나주학생운동이 펼쳐진 곳도 바로 이곳 금성관으로 나주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주목사의 살림집, 목사내아


▲나주 목사내아 입구


목사내아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인 조선시대 나주목사의 살림집으로 일제 강점기때 관사로 사용하면서 원형이 변형되었으나 2009년 복원, 지금은 한옥전통 문화체험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목사내아 입구 우측에 위치한 2,000년이 넘었다는 벼락 맞은 팽나무의 모습


목사내아 금학헌에는 벼락 맞은 팽나무가 거대한 몸집으로 버티고 있다. 이 나무는 벼락을 맞고 두 쪽으로 갈라졌는데 갈라진 부분을 인공적으로 메꾸어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됐다고 전한다. 벼락 맞은 나무는 사람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신령한 기운을 지니고 있는데 오백년 동안 말없이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어오고 있는 이 나무는 사람들에게 행운을 약속하고 있는 듯하다. 

 


▲목사내아 안채의 모습


2009년 5월부터 숙박체험이 가능한 전통문화 체험공간으로 태어난 목사내아 금학헌(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자 하는 선비의 지조가 깃든 집)에서 숙박 외에도 다도, 널뛰기, 투호놀이, 등 전통 민속도 체험해 보고, 인근 금성관을 비롯한 나주읍성권의 문화유산과 곰탕 거리에서 전통의 멋과 맛을 함께 느껴볼 수 있다.

 


▲목사내아 뒤뜰의 장독대가 돋보인다


금성산의 맑은 기운이 뻗어 내린 아름다운 한옥 목사내아에서 금학헌의 팽나무가 선사하는 영험한 체험을 느껴보는 것도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묘미가 될듯하다.


 


#목포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목포근대역사관


▲목포근대역사관 1관의 모습 

 

근대역사관은 목포시 유달동 일대에 2개의 관으로 나눠져 있다. 일본 영사관이었던 근대역사관 1관은 1900년 지금의 유달산 중턱에 자리 잡았다. 1906년 일본 영사관이 폐지된 이후 목포이사청로 사용됐으며, 1910년 이후에는 목포부청으로, 광복 이후인 1947년부터는 목포시청으로 사용됐다.

 


▲우측에서 바라 본 목포근대역사관 1관의 모습


1974년부터는 시립도서관으로 사용하다가 1990년 1월부터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됐으며, 현재는 근대역사관(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 일본 영사관인 이 건물은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건축물로 국가사적 289호로 지정되어 있다. 

 


▲목포근대역사관 1관 내에 전시 되어 옛 목포사진


근대역사관 1관은 목포 개항과 당시 조선의 역사, 일제의 야욕과 수탈의 상징적 사진 등으로 구성된 ▷목포진으로 출발하다, ▷개항장으로 재출발하다. ▷저항의 제일선이 되다, ▷오래 문화가 전파되다. ▷대중 문화의 시대, ▷만세운동 함께해요, ▷근대 도시 건축 특별전 등 7개 구역으로 나눠 전시되어 있다. 

 


▲일제시대 사용하던 인력거와 당시의 골목이 재현되어 있다


목포는 조선시대 목포진으로 불리다가 연산군 8년 1502년 성의 모습을 갖추었고, 한반도 서남해 해양 방어진지로서 역할을 이어왔다. 1897년 목포는 고종의 칭령에 의해 부산, 군산, 인천과 달리 자주적인 개항을 했다. 이후 목포는 국내 6대 도시로 성장하게 됐으며, 쌀, 목화, 소금 등 삼백의 고장으로 불리며 그 명성을 알렸다. 

 


▲목포근대역사관 1관의 모습. 구조가 서양식으로 건립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영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형무소, 목포경찰서 등이 설치되어 억압 받았으나 3.1만세운동, 4.8만세운동, 청년운동, 신간회운동 등 일제에 항거한 역사적인 고장이기도 하다. 

 


▲목포근대역사관 1관에 전시된 당시의 생활 용품들의 모습. 냉장고와 미싱 등이 보인다


1897년 개항 후 기독교와 천주교, 일본 불교인 동본원사가 전파됐으며,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공립심상소학교, 목포여자중학교, 조선인을 위한 문태중학교도 개교하여 종교,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문물을 전파하게 된다. 특히 1920년 목포극장, 1927년 평화관 등이 건립되어 영화 상영과 함께 공연활동, 자선음악회, 가극공연, 연극대회, 대중가요 등 문화 활동이 적극 추진됐던 문화의 고장이었다.

 

  
▲2층 계단에서 내려다 본 목포근대역사관 입구의 모습


근대역사관 1관 뒤쪽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 전쟁에 대비해 만들었던 방공호가 있다. 일제 말기인 1944년에서 45년 사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방공호는 총 길이 85m이며, 밖으로 통하는 3개의 문이 있다. 당시 유달산에 주둔하던 일본군 150사단 사령부가 만든 것으로 방공호로 안에서도 지속적으로 노동 착취가 계속 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영화 1987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연희네 슈퍼


▲영화 1987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연희네 슈퍼 앞에서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며 기뻐하고 있는 모습


연희네 슈퍼는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옛날식 작은 가게지만 영화 1987을 통해 전국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유명 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는 연희네 슈퍼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활동 무대였던 상점 뒤로방 한 칸과 주방이 딸린 단조로운 허름한 건물로 되어 있다.

 


▲연희네 슈퍼 맞은 편에 있는 언희네 의상실의 모습


최근 재개발을 위한 준비로 문이 잠겨 있어 내부를 보지는 못했지만 건물 뒤로는 두 세 평 크기의 마당과 화장실, 그리고 커다란 동굴이 딸려 있다고 한다. 

 


▲연희네 슈퍼 맞은 편에 있는 연희네 문구사의 내부 모습


이 일대는 목포 근대사가 잘 보존되어 있는 작은 골목길로 일제 강점기 때는 일명 유곽거리, 즉 히빠리 골목으로 호객행위를 하던 유희와 환락 지역이었다. 연희네슈퍼 앞 유곽거리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주길정, 현해루, 만직지루, 삼교루 등이 있었고, 조선인이 경영하던 유곽으로는 일출정, 명월루, 영춘정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태극기가 걸려있는 연희네 문구사 모습


연희네 슈퍼 앞으로는 연희네 의상실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간단한 아이스크림 류와 먹거리가 있고, 옛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의상들을 임대하고 있다. 연희네 의상실 옆으로 연희네 문구사와 세탁소 등이 줄지어 함께 문을 열고 있다.

 


▲연희네 의상실의 내부 모습


연희네 슈퍼 앞을 지나 작은 골목길을 더 올라가면 계단으로 인문도시 서산동의 시화골목으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연희네 커피 등이 있으며, 담벼락에는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고무줄놀이에 정신없는 옛 사진이나 지역의 예술가들이 동네분들의 삶을 시로 엮어내고, 그림으로 그려낸 벽화가 제작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연희네 슈퍼에서 위로 더 올라가면 시화골목으로 이어진다. 시화골목 입구의 모습


현재 이곳은 영화 1987을 회상하며 많은 관광객들이 연희네 슈퍼를 찾으면서 앞으로 이 지역을 관광지로 본격  ㅂ개발하기 위해 관민이 협의하며, 준비 중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국내 최장의 목포 해상케이블카


▲목포해상케이블카 입구에 있는 표지석과 케이블카 모습


2019년 9월 6일 정식 개통된 목포해상케이블카는 국내 최장 3.23Km로 목포 시내 북항 스테이션을 출발해 유달산 정상부에서 ㄱ자로 꺾여 해상을 지난 반달섬 고하도에 이르는 국내 최장 케이블카이다.

 


▲주차장에서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의 모습


바닥이 투명한 그리스탈 캐빈을 비롯해 총 55대의 10인승 광폭 도어 캐빈을 채택하고 있는 목포해상케이블카는 다도해의 금빛 낙조와 야경을 최고의 하이라이트로 하고 있다. 

 


▲목포 해상케이블카 탑승 모습


프랑스 포마의 최신 설계와 시공사 새천년종합건설의 첨단 공법으로 건설 된 목포해상케이블카의 5번 타워는 유달산 상부에서 고하도로 향하는 지주 타워로 그 높이가 무려 155m에 이른다. 바닥이 투명한 크리스탈 케빈은 아래가 내려다 보여 아찔하기도 하지만 바닥의 투명도가 유리같이 맑지 않아 생각보다는 짜릿함이 덜하다. 

 


▲목포 해상 케이블카에서 반대로 내려다 본 모습. 케이블카를 타면 우측에 유달산, 좌측으로 목포시가 내려다 보인다


케이블카가 건물을 빠져 나오면서 우측으로는 유달산이, 왼쪽으로는 목포시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유달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던 케이블카는 정상을 지나면서 급속히 내리막을 달리는 듯 내려가 건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곳에서는 케이블카가 우측 방향 90도로 방향을 틀면서 바로 고하도를 향해 서서히 내려가는 듯 운행이 시작된다. 

 


▲목포 해상케이블카가 유달산을 넘어 ㄱ자로 90도 방향을 전환해 고하도로 가고 있는 모습을 반대편에서 본 모습


이번에는 다시 우측으로 목포 교가, 왼쪽으로는 목포시와 바다 모습이 보인다. 목포 시가의 모습을 고루 보면서 고하도를 건너는데 바다 위로는 교각이 없이 케이블카 선으로만 연결되어 있어 케이블카 선이 늘어지는 듯하며 더욱 짜릿함이 강하게 느껴진다.

 


▲종착지인 고하도를 향해 가고 있는 목포 해상케이블카의 모습. 목포 앞 바다를 가로 질러 고하도로 연결되어 있다


짜릿함도 잠시 잔잔해 보이는 바다 위로 배들이 지나는 모습과 우측으로 해가 지면서 주위가 붉어지기 시작하며 보이는 석양의 모습 등은 목포 해상케이블카의 백미로 감동적인 멋진 추억을 만들기에 그만이다. 

 


▲목포 앞 바다를 가로 질러 고하도로 향하고 있는 케이블카를 반대편에서 본 모습


다만, 많은 승객들이 몰리면서 케이블카 탑승까지 오랫동안 서서 기다려야하는 불편함과 질서와 안전에 대한  대책 없는 운영사의 안일함, 도착지인 고하도에 별로 볼거리가 없다는 점 등은 속히 보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자연의 신비가 가득 담긴 명하 쪽염색마을


▲나주 명하마을 명하햇골에서 쪽염색을 마친 체험자들이 자신들이 염색한 것을 건조하기 위해 빨래줄에 널고서 기쁘게 웃고 있다


나주 명하마을은 쪽염색지역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이 마을이 쪽염색마을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이신 고 윤병운 염색 장인이 있었기 때문. 윤병운 선생의 대를 이어 그의 아드님인 윤재중 관장이 명하마을의 아름다운 쪽빛을 이어가고 있다. 

 


▲무형문화재 115호 고 윤병운 염색장(우측)이 전수자인 아들 윤대중(중간)과 며느리 최경자 이수자(좌즉)와 함께 쪽염색을 위한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2003년도 모습)


명하 쪽빛마을은 나주염색기술의 역사와 맥을 잇는 마을로 2008년 농촌진흥청 교육농장 전통 쪽염색이란 주제로 지정되어 염색체험과 교육을 할 수 있게 됐으며, 2010년 농촌관광 테마마을(휴양마을)로 지정되어 체험뿐만 아니라 관광을 할 수 있게 됐다. 

 


▲무형문화재 115호 고 윤병운 염색장(우측)이 전수자인 아들 윤대중과 며느리 최경자 이수자(좌즉)와 쪽염색된 천을 건조하기 위해 빨랫줄에 널고 있는 모습(2003년도 모습)


천연염색인 쪽염색의 과정은 쪽풀재배에서부터 시작되어 색소추출작업, 소석회 및 잿물만들기, 쪽침전물만들기, 쪽물만들기, 물들이기, 수세하기, 건조하기 등의 복잡한 과정과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이수자인 최경자 선생이 쪽염색 교육과정을 윤재중 관장과 함께 이어가고 있다. 

 


▲윤대중 전수자(우측)와 최경자 이수자(좌측)의 모습 


사실 윤재중 관장은 간판스타이고 실질적인 권력자(?)는 최경자 선생인 듯. 체험을 준비하기 위해 강의실에 들어 선 체험자들을 쥐락펴락한다. 최 선생의 마음 속에는 5대째 이어온 쪽염색 과정의 신성함을 그대로 전해주기 위한 열정으로 가득차 있는 듯. 과정 과정 마다 자연과 과학이 함께 존재해 있으며, 천연 자연의 신비로움을 다시 한번 느끼게 했다.  

 


▲최경자 이수자가 체험자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는 모습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쪽염색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다. 자연의 오묘함으로 탄생되는 쪽염색을 제대로 된 절차를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이수해 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친다. 이런 마음을 움트게 만드는 것이 최경자 선생의 축척된 노하우에서 나오는 티칭법이 아닌가 생각되며, 이 일에는 사명감과 열정이 없이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명하햇골에서 만든 특별한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외에도 명하마을에는 마을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간직된 명하둥지생활사박물관이 있다. 실생활에서 쓰던 물건들을 정리하고 그 집의 역사와 더불어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체위를 지닌 유물들을 모아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며, 첨단 기술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세대에게 선조들이 사용해 왔던 도구의 구조를 이해하고 아울러 사라져 가는 농촌의 공동체 정신을 이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버림에서 부활한 양림동과 펭귄마을 이야기 


▲광주 양림동 안내


양림동은 버드나무 숲으로 덮여있는 마을이라 해서 양촌과 유림을 합해 양림이라 칭하게 됐다고 한다. 100여 년 전 호남 최초로 서양 근대 문물을 받아들인 통로이자 희생과 나눔의 공동체 역사를 태동시켰던 광주 정신의 발현지로서 기독교 문화유적과 우리 전통 문화재가 잘 보존된 지역이다. 

 


▲양림동의 골목길 모습


양림동은 특별한 매력은 우리의 과거와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주는 동서의 결합에 있다. 120년 전 광주 5대 부자가 살았던 지역이다. 정낙교가 최고의 부자였는데 그 자식들이 살았던 정병호, 정상호 등 세 부자가 살았다. 

 


▲양림동은 주민들 각자가 자진해 동네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름답게 꾸며 논 벽의 모습


양림동의 좋은 점은 풍경이 과거에서부터 오늘까지 오롯이 남겨진 곳으로 매력이 있다. 양림동의 양림살롱은 여행자 플랫폼 역할을 하는 집으로 짐을 맡길 수 있고, 여행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또한 한희원 미술관은 양림동을 살리고자하는 마음으로 개인 이 미술관을 지은 특별한 곳이다.

 


▲양림동을 대표하는 최승효 고택. 약 100여년 전에 건축된 이 집은 3,000평의 대지에 2층 개량식 한옥으로 지어졌으며, 돌아보는데만 약 40분이 소요된다고 한다


양림동의 특징은 관 주도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처음 여행자 플랫폼이 만들어졌고, 미술관이 들어섰으며, 관의 지원이 전혀 없는 곳으로 양림동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모습으로 발전되어 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런 방식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양림동의 플렛폼 역활을 하며 양림동을 발전시켜 온 여행자 플렛폼 양림살롱. 짐도 맡길 수 있고, 쉬며 간단한 식음료도 가능하다
 

 

 


최승효 고택은 1921년 건축됐다. 당시 건축에 쓰인 나무들은 일부러 압록강 지역에서 가져다 지었는데  그 이유는 바다의 소나무는 나무를 찌지 않아도 오래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약 3,000평 대지에 개량형 2층 한옥으로 건축된 이 집을 둘러 보는데만 약 40분이 걸린다. 다락방에는 일본군에 쫓기던 이들을 많이 숨겨 주었다고 전해진다. 아쉽게도 문이 잠겨 있어 내부를 보지는 못하고 설명으로만 들었다. 

 


▲양림동의 발전을 위해 이곳에 아름다운 미술관을 세운 한희원 미술관의 모습. 건축에서 쓰이는 재료로 만든 문이 눈길을 끈다


광주시 민속문화재 제1호인 이장우 가옥은 광주의 옛 부자동네인 이곳 양림마을에 있는 커다란 집이다. 동서로 길게 늘어선 축에서 약간씩 빗겨나며 대문간, 곡간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가 배치된 상류주택 양식의 기와집이다. 안채의 상량문에 광무 3년 기해 2월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899년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담벼락 너머로 바라 본 광주시 민속문화재 제1호인 이장우 가옥의 모습 


이 건물들 중에서 안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건립 당시의 소유자는 정병호(그의 부친은 정낙교)인데 1959년 현 소유자 이장우가 사들였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정면 6칸이며, 우측면은 4칸과 뒷마루, 좌측면은 1칸과 앞뒷마루가 있다. 

 


▲이장우 가옥의 정문. 들어가는 것은 정문이 아니고 정문 옆에 있는 쪽문으로 통행한다


온돌방의 문은 2분합 겹문으로 안은 미닫이, 밖은 여닫이문을 설치하였고, 대청 문은 4분합 들어열개문을 설치하여 필요시 개발할 수 있게 했다. 2고주 5량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집터 아래의 양림천의 물길과 집 정면에 펼쳐진 무등산 봉우리들의 풍광이 이집과 어울려 한 폭의 경관을 이룬다.

 


▲광주시 민속문화재 제1호인 이장우 가옥의 내부 모습


무등산의 아름다운 전경을 벗 삼아 문화재로 지정된 안채 토방마루에 앉아서 잠깐 쉬었다 고즈넉함을 즐겨도 좋다. 가옥을 오픈하지 않는 날에는 담너머로 구경하라는 안내가 더욱 친근감과 재미를 느끼게 한다.  



▲광주시 민속문화재 제1호인 이장우 가옥에서는 공휴일에도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담장 너머로 가옥을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런 따뜻한 배려가 양림동 마을을 유명 관광지로 이끌고 있는 원동력이 아닐까


이장우 가옥을 지나 골목길을 돌아 가면 효행비가 보인다. 이곳에 얽힌 이야기 인즉, 광주정씨 8세 양촌공 정엄 선생은 예조판서와 8도 관찰사를 역임한 정만종의 셋째 아들로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1558년 등과, 남원부사와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양촌공 정엄 선생의 효행비 모습


정엄 선생은 어머니 병환이 위중해지자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어머니를 위해 수발을 하며, 밤낮없이 하늘에 쾌유를 빌면서 간호했다. 그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선조 12년 어머니가 돌아가자 지금의 운림동에 장사를 지내고 아침저녁으로 호곡하며 묘곁에 시묘살이를 하던 중 양촌은 1580년 어머니 가신 바로 다음해에 지쳐 앓다가 돌아간 출천의 효자였다고 한다. 

 


▲효자 광주 정엄 선생의 효행비각 모습


이 효행비는 1611년 광해군 3년 예조판서 월사 이정구 선생의 상소로 이곳 생가터 입구에 세워져 오늘에 이르렀다. 효자비 앞에 서 있는 사자모양의 석상은 양촌이 기르던 개의 모습으로 한양과 평양 등지에서 감사를 지내던 아버지와 양촌 간의 연락은 물론, 한양과 감영지방 방백들과 문서수발 등 신속한 통신연락업무를 해 내기로 유명하다. 

 


▲양촌공이 기르던 충견의 모습


구전에 따르면 각종 문서나 연락사항을 보자기에 싸고, 가고 올 노잣돈만큼의 엽전을 전대에 넣어 목에 걸어주면 보내고자 하는 곳을 다녀왔고 지정해 준 주막에서 밥을 먹고는 밥값만큼의 엽전을 빼면 가고, 그렇지 않을 때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중수기념비의 모습


어느 엄동설한에 양촌공이 급한 일로 새끼 날 때를 감안치 않고 그만 한양으로 심부름을 보냈다. 개는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아홉 마리의 새끼를 낳게 되었고 주인이 살고 있는 곳까지 한 마리씩 나르기 시작했는데 마지막 아홉 마리째의 새끼를 나르다 그만 지쳐서 죽고 말았다. 

 


▲양림동 여행 안내도


자신의 실수로 개가 죽었다고 자책하며 슬퍼하던 양촌공은 개의 상을 조각케 하여 집 뜰에 세우고 추모했으며, 양촌공 효자비가 세워질 무렵 충견상도 함께 이곳에 옮겨져 ‘죽어서도 주인을 지키고 있는 양림마을 충견’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팽귄마을을 상징하는 그림


양림동의 랜드마크인 펭귄마을은 마을은 펭귄텃밭부터 시작된다. 불이 나 전소된 빈집이 흉물처럼 자리하면서 방치된 그곳에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했다. 누구도 치울 생각을 하지 않고 쓰레기는 더욱 많이 쌓이게 됐다.

 


▲팽귄마을 입구 모습. 우측으로 개발을 위해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공사기간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자 동네 주민이었던 김동균 펭귄마을 촌장이 앞장서서 빈집을 깨끗하게 치우기 시작했고, 쌓인 쓰레기를 골라 예쁘게 꾸미고, 그곳에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동조하기 시작하면서 텃밭에서 재배한 갖가지 농작물을 함께 나누며 더욱 친밀하게 됐다. 주민들은 이 텃밭에 이름을 지었는데 40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불편한 걸음을 내걷는 촌장의 걷는 모습이 흡사 펭귄 같다고 해서 펭귄마을로 붙여졌다고 한다. 팽귄마을은 공예 특화거리 조성 공사 관계로 출입이 금지되어 보지는 못했다. 

 


▲광주문화나루 박구환 갤러리의 모습


양림동에는 이장우 가옥, 최승효 가옥, 팽귄마을 등을 비롯해 다형 김현승 시비, 선교사 묘역, 우일선 선교사 자택, 원스브로우홀, 수피아홀, 커티스메모리얼홀, 피터슨 선교사 사택, 양림미술관, 유진벨 선교기념관, 오웬기념각, 어비슨기념관, 조아라 기념관, 518민주항쟁 사적비, 뒹굴동굴, 정율성 흉상, 정율성 생가, 31만세운동길 등 많은 역사적인 사적들이 즐비해 있다.  


 

#선비의 꿈과 삶의 의지가 서린 맑고 깨끗한 곳, 소쇄원(瀟灑園)


▲소쇄원 안내도


누구라도 시 한수 정도는 읊을 것 같은 자연의 모습을 담고 있는 소쇄원은 이곳에 들어서면서 고즈넉한 옛날 선비의 삶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소쇄원은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원림으로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풍기는 아름다움에 자연과 인공이 잘 조화되어 있다.

 


▲소쇄원의 모습


맑고 깊을 소(瀟), 뿌릴 쇄(灑)로 맑고 깨끗하다는 뜻을 가진 소쇄원은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빗겨나 맑고 깨끗한 세상을 일구고자 했던 선비의 꿈과 삶의 의지가 서린 곳이다.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소쇄원의 모습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화를 입자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기 위해 지은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자연미와 구도 면에서 조선시대 정원 중에서도 첫손으로 꼽힌다. 1983년 7월 20일에 사적 제304호로 지정됐다가 2008년 5월 2일 명승 제40호로 변경됐다. 

 


▲'소쇄원을 거닐다' 란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당시의 의복을 입고 양산보 역을 맡은 이향준 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 전임연구원(맨 좌측)의 소쇄원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소쇄원을 체험하고 있다


당시의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다시 복원, 중수하여 현재 2동이 남아 있다. 소쇄원은 조선중기 호남 사림문화를 이끈 인물들의 교류처 역할을 했다. 면앙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사촌 김윤제,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이 드나들면서 정치, 학문, 사상 등을 논하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소쇄원의 계곡에서 당시의 의복을 입은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정준수 전주시립국악단 상임단원의 거문고 특별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소쇄원은 크게 내원과 외원으로 구분하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쇄원은 내원이다. 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사다리꼴 형태로 되어 있다. 4.060m2의 면적에 기능과 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 구역, 오곡문 구역, 제월당 구역, 광풍각 구역으로 나뉘며,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양산보 역을 맡은 이향준 전남대 전임연구원이 소쇄원의 한 담에 박혀 있는 애양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곡문 담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 물은 폭포가 되어 연못에 떨어지고, 계곡 가까이에는 제월당(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집)과 광풍각(비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의 사랑방)이 들어서 있다.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벼락에 박혀있다. 

 


▲소쇄원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양산보의 설명을 들으며 잠시 쉬고 있다


소쇄원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모습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가 남아 있어 원형을 추정할 수 있다. 이곳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하다. 지금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 손 양택지에 의해 보수된 모습이다. 

 


▲소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모습


이곳에서는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가 되어 보는 ‘소쇄처사 양산보와 함께 걷는 소쇄원’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매년 6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진행되며, 10인 이상 단체 시 평일 체험도 가능하다. 오전 10시부터 약 3시간이 소요된다.

 


▲당시의 의복을 입은 프로그램 참가자가 소쇄원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다


소쇄원에 입장해 당시의 의복을 입고, 양산보로 분장하여 처사로부터 설명을 들으며 소쇄원을 돌아본다. 오찬으로는 처사밥상 또는 거사밥상(선택)을 받게 된다. 신청방법은 소쇄원 홈페이지 또는 네이버 소쇄처사 양산보와 함께 걷는 소쇄원에서 검색하면 된다. 

 

 

 

#문화예술이 꽃피는 광주호호수생태원 


▲광주호호수생태원의 안내도


울창한 버드나무 군락지가 조성되어 있는 광주호 호수생태원에는 자연관찰원, 자연학습장, 야생초화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 만들어진 생태원을 다 돌아보지 못하고 황지혜 작가의 해우소와 DMZ 금지된 정원 만 돌아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황지해 작가의 작품인 옛 전통 화장실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해우소의 모습


황지해 작가는 해우소를 근심을 털어버리는 곳, 마음을 비우는 곳으로 정의하고 있다. 우리의 옛 전통 화장실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해우소는 주변의 환경 또한 옛 그대로이다. 생태원에 생뚱맞게 웬 해우소지?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쉽게 됐다.

 


▲나무로 만든 전망대에는 전쟁을 상징하는 M1소총, 수통, 반합, 군화 등이 있어 근접할 수 없는 금지된 정원임을 금방 느끼게 하고 있다


우리는 먹고 싸고 버리는 행위 속에 겸손함을 배운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분뇨는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토양은 식물을 살찌우고 우리는 그 식물을 섭취한다. 이러한 순환의 관계 속에서 비움과 환원을 깨닫는다. 해우소 정원은 개념예술로써 몸을 비우고 마음을 비움으로써 스스로 자유롭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2011년 영국 첼시플라워쇼 아티즌 가든 부문 최고상 및 금메달을 수상한 작품이다. 

 


▲전망대 밑부분에 걸려있는 반합과 군화가 을씨년스럽게 다가 온다


DMZ 금지된 정원은 고요한 시간이다. 정말 DMZ에서나 볼 수 있는 전망대와 M1소총, 물통, 반합, 군화, 군번 등이 목제로 만든 전망대 군데군데 걸려 있고, 비무장지대를 상징하는 철조망과 철길이 들풀들 사이로 나뒹굴러져 있는 모습으로 설치되어 있어 누구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금지된 정원임을 쉽게 깨닫게 한다. 

 


▲한국전쟁 당시 사용했던 M1소총. 젊은이들은 잘 모르는 무기일 수도 있다


2013년 한국의 비무장지대 나이가 60살이 됐다. 한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아픔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DMZ 안에는 원시림에 가까운 자연 식생이 형성됐다. 의도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녹색 눈처럼 우리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덮어주고 있다. 

 


▲저 넘어에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 누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철조망. 우리에게 철조망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 놓은 38선을 넘어 물은 경계 없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DMZ는 DMZ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순환과 자연의 재생력, 즉 정원의 본질적인 부분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작품은 황지혜 작가가 출품해 2012년 영국 첼시프라워쇼에 회장상, 초대 수상 기록 및 쇼가든 부문 금메달을 수상한 작품이다.  

 


취재협조 : 한국관광공사 광주전남지사 
 

전라도 광주 · 목포 · 담양 · 나주 = 이상인 선임기자 lagolftime@tt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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