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엘뉴스] '이불―시작'전시는 세계적인 작가 이불의 초기 활동이 있었던 10여 년 동안 집중적으로 발표된 ‘소프트 조각’과 퍼포먼스 기록에 관한 전시이다.
20대 여성작가 이불이 활동을 시작했던 1980년대 후반부터 초기 활동을 아우르는 1990년대 한국 사회는 대중문화의 범람, 국제화의 물결, 세기말적 두려움, 그리고 세기에 대한 희망이 상충하는 역사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5월 16일까지 개최하는 이번 전시에선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서 형성된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조각, 드로잉은 물론 작가의 예술적 사유와 탐구의 과정이 담긴 모형, 오브제 등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불의 초기 작품과 자료들을 다양하게 소개한다.
이번 전시에서 이불은 작가활동을 시작했던 1987년부터 이후 10여 년간 집중적으로 발표한 소프트조각과 퍼포먼스 기록을 보여준다. 드로잉 50여점과 참여형 조각 1점, 영상과 사진 70여점, 조각과 오브제 10여점이다.
로비에 설치된 ‘히드라’는 1996년 시작한 풍선 모뉴먼트 작업을 다시 제작한 것이다. 관객들이 펌프를 밟으면 풍선이 커지는 형태다. 단, 4만회 이상 펌프를 밟아야 10m 높이의 풍선 형상이 완성된다. 천 풍선에는 왕비, 여신, 게이샤, 무속인, 레슬러 등 복합적인 여성 이미지로 분한 작가의 초상이 인쇄됐다.
▲ [이불-시작1] 로비_히드라: 관광 상품으로 개발된 부채춤 인형, 왕비, 여신, 게이샤, 무속인, 여자 레슬러 등 복합적이면서 독창적인 아시아 여성 이미지로 분한 작가의 초상 사진을 인쇄했다. 순결의 상징인 백합을 손에 쥔 이불은 성녀와 창녀, 어머니와 팜므 파탈, 아줌마와 소녀, 그리고 공주와 신데렐라와 같은 여성에 대한 통념을 비웃으며, 생물학적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단순하고 한정적인 시선과 동시에 여성들의 콤플렉스를 이중으로 질문한다.
이불의 작품은 신체의 안과 밖, 남성 중심의 모더니즘 유산, 한국의 근대사와 지배 이데올로기 등을 관통하며 포착된 상징을 모티브로 삼아 아름다움, 추함, 삶, 죽음, 정신, 몸, 빛, 그리고 어두움 같이 충돌하는 의미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 충돌의 작용은 사회, 정치, 젠더, 계층, 인종 등에 관한 외적 시선을 투영하여 기존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이불의 초기 작품들은 크게 ‘여성의 신체’, ‘문화정치적 공간’, 그리고 ‘근대성의 바깥’이라는 세 가지 관점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초기 활동에서 주요 소재이자 주제인 ‘몸’은 여성 혹은 여성의 신체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만큼 작품 세계의 중심에 있었다. 시각의 언어, 그 중에서도 조형성을 기반으로 한 이불의 실험 정신은 당대의 청년 작가이자 여성 작가로서 집요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질문하고 확인해가는 여정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1982년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작가는 기존의 제도에서 중시했던 재료나 표현에서 벗어나고자 부드러운 천, 가벼운 솜, 장식적이고 수공예적인 시퀸과 털, 유동적인 철사, 그리고 냄새와 시간을 주요 창작 재료로 삼아 형태적인 변주를 만들었다.
특히 1980년대의 한국 사회, 남성 중심적 상징체계나 신화, 그리고 여성 억압적 정신분석학 이론이 중심에 있는 세계관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이불의 조각은 단순히 여성의 우월함을 주장하지 않았다. 때론 여성에 대한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시선을 자처하며, 오히려 실존적인 형체나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작가이자 여성인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1990년부터 약 5년간 이불은 셀 수 없이 많은 전시와 행위 예술 축제에 참여하며 전시와 퍼포먼스를 병행한다. 근대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방독면, 군화, 그리고 부채와 같은 소품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원피스를 입은 소녀, 하얀 소복에 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색동 한복을 입은 황후와 같은 캐릭터들이 기존의 기호와 상징체계를 위협이라도 하듯 대항적 주체로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 캐릭터들이 만드는 일련의 행위 ― 돌연 줄넘기를 하고, 그네를 타고, 물이 담긴 수조에 들어가 생선을 건져 속을 가르거나 쓰다듬고, 괴성을 지르고, 웃음을 터트리고, 과장된 남성성이나 그로테스크한 여성성을 표현하는 듯한 몸짓 등 ― 들은 기존의 문화 이데올로기를 환기하는 동시에 풍자하고 있다.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 초청된 작가는 엄숙한 모더니즘의 상징과도 같은 전시장에 <장엄한 광채>의 날생선을 설치했다가 악취로 인해 작품이 철거되는 사건을 겪는다. 기존의 미술관이 가진 관습성에 정면으로 대응하며 벌어졌던 이와 같은 상황은 이불의 퍼포먼스가 지닌 우발성의 연속선에 있다.
▲[이불-시작] 전시전경, 서울시립미술관, 2021. 사진: 홍철기.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우리가 살아왔던 사회와 문화의 맥락은 계속해서 변화 중이며, 이 변화는 글로벌 자본주의, 모더니티, 그리고 기술 발전의 연속선에서 새로운 법칙과 상황을 만들고 있다. 청년 작가 이불이 작품에서 제시했던 독창적인 표현과 에너지를 읽고 느끼는 과정에서 우리는 저마다 마주하는 특정 세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작가 이불의 눈과 몸에 투영된 시대 감각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둘러싼 경계의 안과 밖을 가로지르며, 잠재하는 예술적 감흥과 주체적 존재 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촉구하고 있다.
이린 칼럼니스트 art-together@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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