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엘뉴스] 2년 가까이 봉평에 손바닥만 한 거처를 구해 주말은 강원도에서 지냈다. 코로나19의 침공으로, 대부분의 만남이 차단된 시간이었다. ‘현지인처럼 여행하기’를 주제로 강원도 곳곳을 어슬렁거렸다. 명산 오르기와 숲 체험은 물론이고 바다도 자주 찾았다.
무더위가 기승부리는 휴가시즌이면, 전국 해수욕장에는 ‘피서객 북적’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레 붙는다. 극성수기에 유명 해수욕장을 찾으면, 모처럼 쉬러 갔다가 인파에 치여 지친다. 하지만 시야를 넓히면 한여름에도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피서를 즐길 수 있는 해수욕장이 있다.
그중 하나가 고성의 아야진 해변이다. 맑은 물은 기본이고 깨끗한 백사장과 다양한 즐길 거리, 볼거리까지 갖추고 있다. 여러 장점 중 최고의 미덕은 번잡하지 않다는 점이다. 아야진 해수욕장에 도착해 백사장에 첫발을 내디디면, 보드라운 모래가 환영한다. 아야진 해수욕장에는 고운 모래뿐만 아니라 아기자기한 바위도 많아, 여러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아야진은 등대가 있는 바위가 거북이처럼 생겨 한때 거북 ‘구’에 바위 ‘암’, 구암마을이라 불렸다. 이후 작은 항구 ‘애기미’라는 별칭을 얻었다가, 마을의 산 모양을 닮은 한자 ‘야(也)’자에 ‘우리’를 뜻하는 글자를 합쳐 아야진(我也津)이라고 부르게 됐다.
해수욕장에서 컬러풀한 인스타그램 핫스팟으로 변신
아야진 해변에는 SNS 핫스폿도 있다. 아야진해변에서 교암해변으로 이어진 1km의 무지갯빛 도로 경계석이다. 도로를 나누는 경계석이지만, 파스텔 톤 색을 더하니 작품처럼 다가온다. 예술의 역할, 특히 현대미술의 특징이 무엇인가. 미학적 아름다움을 통해 관람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현대미술은 형태적, 색채적, 의미의 충돌을 통한 내적 갈등을 유발해 관람객에게 새로운 생각의 창을 열어준다.
기존 틀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며 어제와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현대미술이라면 고성군청 경제투자과에서 색으로 물들인 아야진 해변 경계석은 예술품이다.
그런 의미로 봤을 때 미술사에서 유명한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는 현대 미술가의 교훈적인 표본이다. 리히터의 대표작이 이를 증명한다. 리히터는 1960년대 사진 이미지를 차용해 회화의 윤곽을 모호하게 하는 ‘사진 회화’를 선보이며 클래식 한 회화 장르에 도전장을 냈다. 더불어 몽타주 기법을 사용해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초현실주의적 회화를 선보였다. 추상에서도 채색과 단색을 자유로이 넘나들 뿐 아니라 래카와 에나멜 스프레이를 사용한 매끈한 컬러 패널 작업까지, 오늘날 회화가 시도할 수 있는 확장의 끝을 보여줬다. 더 놀라운 점은 시기상 이 작업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4900가지 색체에 드러난 창조 신념
그의 창조적 신념은 2021년 에스파스 루이뷔통 서울에서 선보인 ‘4900가지 색채’에도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은 서로 다른 25가지 색상으로 구성된 5×5의 패널 196개를 배열한 작품이다. 모두 4900(25×196=4900)개의 픽셀이 약 7×7m의 대형 화면에 설치된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사진 회화나 유리 회화 등 그동안 리히터가 선보인 추상 기반의 회화와 달리 ‘4900가지 색채’는 작가의 의도가 단번에 파악되지 않는다. 붓질이나 물감의 물성이 만들어낸 오브제적 회화가 아니다 보니 관람객은 자칫 ‘무엇을 봐야 하는지’ 궁금증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중요한 힌트다.
리히터는 이 작품에서 지배적 구조를 찾지 말라고 당부한다. 1932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전쟁을 경험한 트라우마로 그는 어떤 ‘주의’나 ‘이즘’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수차례 밝혀 왔다. 이 같은 작가의 태도는 사진과 회화, 추상과 구상, 채색과 단색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역을 확장해, 올해 90세가 된 그를 거장의 반열에 이르게 한 것이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아카이브는 2006년 독일 국립미술관에 소속되어 문을 열었다. 이는 작가의 명성과 현재 위치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생각할 부분은 아야진 해변도로 경계석과 리히터의 작가적 태도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새롭게 하고 있는가? 아야진 해변의 경계석과 그의 작품을 마주한 채, 나 자신의 어제와 오늘을 곱씹어 본다.
이린 아트칼럼니스트
art-together@kaka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