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엘뉴스] 우리나라 역사에서 3·1운동은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자주성, 자유, 평등을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알린 의미 있는 독립운동이다. 우리와 멀리 떨어진 발트해에서도 우리와 닮은 비폭력 저항 운동이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670km의 살아 있는 길을 만들어 자유를 외쳤다.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이 발트해 3국이다.(출처: 구글 맵)
우선 발트 3국은 어디일까. 발트해는 북유럽·동유럽으로 둘러싸인 바다인데, 발트 3국은 발트해 동쪽에 있는 에스토니아·라트비아·라투아니아 3개 국가를 말한다. 발트 3국은 외세의 간섭을 많이 받은 지역인데, 지도를 보면 왜 발트 3국이 외세에 시달렸는지 알 수 있다. 발트 3국을 찾기 전에 러시아·독일 등 강대국이 먼저 보일 정도다.
발트 3국은 서로를 존중하고 각국의 문화유산을 보전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실제로 발트 3국 간 정복 전쟁은 거의 없었다. 인종·종교 갈등도 심하지 않았다.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 덕분에 발트의 길이 발트 3국을 가로질러 만들어질 수 있던 배경이 됐다.
‘발트의 길’은 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발트 3국의 배경을 듣다 보면 우리나라의 근대화 역사와 너무 닮아 신기할 정도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1939년 8월 23일 소련과 나치 독일이 비밀 불가침조약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했다.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 두 나라가 발틱지역을 포함한 일대 지역을 분할 점령했다. 왠지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역사가 생각난다. 발트 3국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이후 소련의 지배를 받았다.
▲발트의 길(사진제공: 주한라트비아대사관)
소련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발트 3국을 지배했고 발트해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연방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발트 3국에서는 독립운동이 진행됐다. 특히 1988년부터 1991년은 발트해 연안 국가들의 독립운동 시기였다. 독립운동 시기에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50주년인 1989년 8월 23일 발트 3국의 국민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670km의 ‘발트의 길’을 만들었다.
▲각국의 깃발을 들고 발트의 길에 참여한 시민들(사진제공: 주한라트비아대사관)
발트 3국의 민족운동 세력인 △에스토니아 인민전선 라바린네 △라트비아 인민전선 라트비아 타우타스 프론테 △리투아니아의 사유디스 등은 각자의 나라에서 시민들을 이끌었으며, 시민들도 기꺼이 참여했다. 저항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은 각자의 말로 함성을 외쳤는데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라이스베스(laisvė)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바바두스(svabadus) △라트비아 사람들은 브리비바(brīvība) 라고 외쳤다. 말은 다르지만 이들이 외친 단어는 ‘자유’라는 뜻이다. 이때 시민들은 △소련의 점령 △식민지화 △폭력화 △공산주의 집단학살의 중단 등을 요구했다.
독립을 위한 열정이 다른 나라로 퍼져 나간 것도 3·1운동과 닮았다. ‘발트의 길’도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소련이 점령했던 △베사라비아 △키시네프에서도 인간 사슬을 만들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리비우에서 키예프 사이에서 손을 잡는 형태로 재현되기도 했으며, ‘발트의 길’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비폭력 혁명인 ‘벨벳 혁명’이 시작되기도 했다.
유네스코는 ‘발트의 길’을 기록한 사료의 가치를 인정해 2009년 세계기록유산에 포함했다. 3·1운동과 쌍둥이 비폭력 저항 운동인 ‘발틱의 길’이 내일(23일) 30주년을 맞는다. 발틱 3국의 시민들이 손을 맞잡고 외쳤던 ‘자유’는 비슷한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3·1운동을 떠올리게 해 남다른 감동을 준다. 발틱 3국은 아픈 역사를 갖고 있지만, 화려한 모습과 청정한 자연환경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의 리투아니아는 유럽의 작은 나라이지만, 과거에는 유럽에서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 그런 리투아니아의 역사는 빌리우스 대성당에서 볼 수 있다. 빌리우스 대성당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관식 장소였으며, 성당 지하실과 납골당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중요한 왕과 왕비의 묘가 있어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겐 중요한 문화재 중 하나이다. 하지만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점령했을 때는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건물을 깎아 내리기 위해 대성당을 미술관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리투아니아 샤울레이에 가면 십자가 언덕을 볼 수 있는데, 언제 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십자가들이 있다. 지금도 십자가가 계속 늘어나고 있어 십자가가 몇 개나 있는지 알 수 없다. 1993년에 교황 바오로 2세가 십자가 언덕을 평화·사랑·희생의 상징으로 선포해서 더욱더 유명해졌다.
▲검은 머리 전당(출처: 티티엘뉴스 사진DB)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는 소련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구소련의 라스베가스’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한 도시였으며, 지금도 아름다운 건축물이 남아있는 도시다. 그런 리가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물은 검은 머리 전당(Melngalvju nams)이다. 검은 머리 전당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1344년이라고 한다. 이 건물도 고난을 겪었는데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폭격으로 무너졌고, 소련은 폭격의 잔해를 치워버렸다. 지금 건물은 2001년에 재건해 모임 장소와 콘서트홀로 이용하고 있다.
시굴다는 라트비아에서도 작은 마을이지만 많은 여행객이 찾는 곳인데, 산악지대가 많지 않은 라트비아에서 유일하게 스키를 탈 수 있는 지역이라 겨울에는 더욱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시굴다에 있는 쿠트마니스 동굴은 이 동굴에서 흘러나온 물로 환자를 치료했던 치료사의 이름을 따 쿠트마니스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작지만 아름다운 동굴이다.
에스토니아 타르투에 있는 타르투대학은 북유럽·동유럽 지역에서 역사가 깊은 대학 중 하나로 무려 1632년에 설립한 대학이다. 타르투대학의 역사와 기념물은 타르투대성당에서 볼 수 있다. 타르투대성당은 각진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건물은 13세기에 독일 기사단이 지었다고 한다. 타르투대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었는데 첫눈에 보기에는 강인하고 무뚝뚝해 보이기도 하다.
▲탈린 성벽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은 회색 성벽과 고깔 모양의 탑 지붕 그리고 푸른 숲이 어우러진 도시이다. 탈린에 있는 알렉산더 넵스키 사원의 왠지 테트리스가 생각나는 건물이다. 실제로 알렉산더 넵스키 사원은 러시아가 에스토니아를 지배할 때 지은 러시아 정교회 건물이다. 교회의 종탑은 11개로 이뤄졌고 종의 무게는 15톤에 이른다. 탈린의 구청사와 시청광장은 13세기 유럽의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구청사는 십자군 기자들이 성을 지으면서 교회·상인 구역·공공시설을 함께 지으면서 시작됐다. 시청광장에는 오픈 테라스를 갖춘 식당들이 있어서 아름다운 중세 도시에서 식사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강지운 에디터 jwbear@ttl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