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기행(7) 카르타고의 디도 여왕
2016-10-24 19:26:15 | 권기정 기자

1.07 카르타고의 디도 여왕

 

카르타고(Carthage)와 로마의 건축기술

 

튀니스 시내에서 비르사 (Byrsa)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동그란 호수 모양으로 만들어진 항구의 흔적이 있다. 가이드는 이곳이 카르타고의 ‘푼 항구(Punic Ports)의 유적’ 이라고 말한다. 푼항구 란 포에니 사람들의 항구란 뜻으로 포에니는 카르타고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곳은 카르타고의 전투함들이 있었던 항구로 박물관에 가면 이곳을 복원한 상상도가 있는데,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카르타고의 위용을 떨쳤던 이 항구는, 지금은 원형 형태의 항구와 가운데 인공 섬 등의 흔적만 남아 예전의 카르타고의 영화를 상징하고 있다. 이곳은 차를 타고 가다보면 무슨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호수 같아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으로 누가 따로 설명해주기 전에까지는 일부러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 이다. 이 원형의 항구 유적지는 카르타고의 항구로 생각하기에는 작아서 요트 계류장으로 생각하기 쉬울 정도로 그 규모는 크지 않다. 지중해에 접한 튀니스 항구를 지나다가 보았던 거대한 크루즈 선들은 보통 7만톤에서 12만톤 정도이다. 최근에는 22 만톤급의 세계최대의 크루즈선이 진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3,000여년 전의 배들과 크기를 비교해보면 그 당시의 배들은 매우 작았을 거라 생각이 든다. 실제로 유럽의 해양 박물관에 가서 보면 로마시대 갤리선 정도 되어야 전투 병력들과 노 젓는 노예들이 탑승해 전투가 가능했을 것 같고, 다른 작은 규모의 배들은 생각보다 크기가 작았을 것이다.

 

 

잠시 내려서 항구의 모습을 살펴본다. 작은 호수처럼 보이는 곳이 이전 카르타고의 커다란 원형 선착장이었다고 한다. 관광객을 상대로 카르타고 시대 고대 주화라고 하면서 파는 남자가 있다.

“이곳에서 발굴한 진짜 카르타고 당시의 동전입니다. 1개에 10디나르”

진짜라고 하면서 사라고 한다. 작은 동전 하나에 만원이라고 한다. 여러개를 가지고 보여주면서 계속 달라붙는다. 한번 관심 있게 보니 조악한 생김새가 모조품 같은데 천연덕스럽게 진품이라고 한다. 이것을 TV의 진품명품에 가지고 나가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련지

 

차에 타면서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다.

“저 카르타고 동전이 진짜 맞나요?”

“카르타고 시대 것은 아니고 로마시대 동전 같습니다”

유적지 근처에서 가끔 로마시대 당시의 주화들이 발견되는데 주민들이 그것을 가져다가 판다고 한다. 하지만 모조품일 가능성이 많다고 덧붙인다. 항구 유적을 보면서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물어보았다.

“카르타고가 배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조선기술이 얼마나 발달했을까요?”

“당시에 카르타고는 5단 캘리선을 만들 정도로 발달한 조선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도 조선소의 흔적이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카르타고는 지중해의 교역으로 성공한 나라답게 최고수준의 조선 기술을 보유했습니다.”

짧은 영어실력 덕분에 조금은 건조하게 대화가 되고 있지만 이곳의 느낌을 전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때의 발달한 조선기술을 생각해 보게 된다. 당시에 배를 타고 레바논이나 시리아에서 지중해 아래까지 항해 해온 것을 볼 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박물관에는 고대 카르타고의 항구를 복원해 놓은 그림이 있다. 그림을 보며 카르타고 인들에게 감탄을 하는 것은 동그랗게 요새같이 안쪽에 숨겨져 있는 항구이다. 이 항구는 외부에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요새 같은 구조로 되어 있어 외부의 공격에도 안전하고, 220여척의 전함을 정박시킬 수 있는 시설들이 있는 등 당시의 기술을 총동원해서 설계하여 매우 효율적으로 배치한 것을 알 수 있다. 지중해의 해상 무역을 독점하였던 카르타고는 훌륭한 조선기술과 항해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로마에서는 카르타고가 보유한 해군에 대항하기 위해 카르타고의 5단 캘리선을 응용하여 로마의 전함으로 만들어 썼다고 한다.

 

카르타고 유적은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어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위치는 알 수 있다. 한니발 카르타고 역에서 도보로 10여분 걸어 올라오면 처음 들르게 되는 곳이 카르타고의 건국설화가 서려있는 비르사 언덕(Byrsa Hill)이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지중해의 푸르른 전경이 한 폭의 사진 엽서에 나오는 사진 같다. 대부분의 오래된 도시들은 언덕을 중심으로 건설되었는데 단순히 한눈에 보이는 전망이 아닌 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탐지하고 방어하기 위해서란다. 또한 지배자의 권위를 나타내기에도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것이 유리하기도 하고, 나중에 관광객들에게는 전망좋은 곳이 되어 좋긴 하지만 어느 곳이든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도시를 만드는 공통점이 있다.

 

비르사 언덕 그 한 가운데의 알짜배기 자리에 세인트 루이스 성당 (라크로폴리움 L’Acropolium)이 눈에 제일 들어오게 되는데 이 건물은 18세기에 세워졌고, 비르사 언덕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있다. 로마건축물 사이의 고딕 건물은 1884년 프랑스 식민당국이 13세기 프랑스 왕 루이 9세(세인트 루이스)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라 한다. 고대 로마사람들이 그랬듯이 식민지 사람들에게 ‘본국이 많은 힘이 있어서 너희들을 지배하는지’를 증명하듯, 본국의 위엄과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전시물인 셈이다. 프랑스는 이곳에 건물을 지으면 로마와 같은 문화적 전통과 수준을 가졌을 거라 착각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당시 루이 9세는 1270년 불운한 8차 십자군 원정 중에 여기까지 왔다가 전쟁은 해보지도 못하고 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1270년)

 

 

카르타고 지역의 주요한 볼거리는 여섯 곳으로 넓은 지역에 퍼져 있기 때문에 보통 관광객들이 유적지 관광을 시작하는 곳이 바로 비르사(Byrsa)언덕으로 로만 빌라와 원형극장 등이 있고 높은 지역이라 사방으로 확 트인 훌륭한 전망을 제공하는 곳이다. 기슭에 있는 세인트 루이스(St Louis) 성당은 이쪽으로 오는 길에서도 볼 수 있으며 커다란 덩치 덕에 잘 보인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카르타고의 화려한 역사와 고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며 누렸던 지배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로마제국이 철저하게 파괴하였기 때문에 현재 남은 유적은 그리 많지 않다. 한니발 장군과 카르타고의 유적을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곳 카르타고의 대부분의 유적들은 로마시대에 시작된 것이다. 이미 카르타고가 멸망한 후에 로마가 그 위에 다시 도시를 건설하였기에 실질적으로 로마의 유적지라 할 수 있다. 만약 카르타고 도시의 형태를 보려면 캡본 반도의 케르쿠안 (Kerkouane)에 가면 고대 카르타고의 도시 형태의 유적을 볼 수 있다.

 

시디 부 사이드의 생성과 관련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루이 9세의 야사(野史)가 있다. 그가 여기 오자마자 병사(病死)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사이드로 이름을 바꾸고 장수를 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곳 사람들이 이슬람 성인(聖人)으로 추대하고 동네 이름으로까지 남게 됐다고 한다.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루이9세와 시기적으로 비슷한 것이 이슬람의 말 많은 사람들이 입방정을 떤 것이고 믿거나 말거나 한 야사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다.

 

 

로마 빌라(Roman villas)

 

 

예전에 로마사람들이 살았던 집터이다. 튀니스만이 내려다보는 경치 좋은 언덕에 자리 잡은 로만 빌리지는 지금은 부자들의 별장 터이다. 서울의 한남동 같이 물이 보이는 좋은 자리라 권력자들이 좋아해서 바로 튀니지의 대통령궁이 이곳에 있으며 대사관 등 고급 주택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군데 군데 경찰들이 있어 대통령 궁쪽으로 사진 찍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테러 같은 것에 무지무지 알러지들이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빌라는 동네의 연립주택의 개념인데 여기서의 빌라는 정원이 딸린 빌리지의 개념이다. 빌라라고 해서 ‘그 당시에도 연립주택이 있었나?’ 하는 개념없는 생각을 했던 것이 부끄럽기만 하다. 빌라 유적지로 들어가는 길 바로 옆에는 대사관 관저가 있는 정말 한산하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이곳은 크루즈에서 내려 투어를 나온 관광객들의 무리들만 보인다. 토목의 대가인 로마사람들의 작업물이어서 그런지 집안의 구획을 잘 나누어놓은 거 같다. 유적을 보노라면 당시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이 그려지는 것 같다. 멋진 곡선미와 아름다운 재질로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하얀 대리석 기둥과 로만 모자이크등과 벽들이 곳곳에 남아 있고 곳곳에는 목이나 손, 발이 파손되었지만 보존상태가 좋은 각종 신들의 대리석상도 서 있다. 그냥 집터라고 하기에는 뭔가가 부족한 것 같다. 돌들과 벽돌들을 사용해서 지은 집터와 기둥들이 산재해 있어 제법 큰 건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쪽에는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기둥하나가 계단위에 서있다. 나머지 기둥 조각들은 가지런히 누워서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하는 것 같은데 무슨 통나무를 모아놓은 것 같다.

 

언제나 감탄하는 것이지만 로마사람들의 토목건축 기술하나는 세계최고인 것 같다. 스페인이나 인근에 건설된 많은 수도교 유적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로마시대에 이곳 카르타고에서 사용하던 물은 모두 여기서 80킬로나 떨어진 자구안山(물의 신전이 있는 곳)에서부터 거대한 수로를 건설하여 물이 끌고 왔다고 한다. 로만 빌라 옆으로 만들어진 수로의 일부 흔적은 로마가 최고의 기술로 만들었던 당시의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 수로는 워낙 튼튼하게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부분들은 보전상태가 상당히 좋은 편이라고 한다. 로마제국은 카르타고를 점령한 이후부터 화려하게 지중해의 패자로 자리매김하였으니 이곳이야 말로 그들에게는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카르타고의 디도 여왕

 

 

지금으로부터 거의 3천년 전에 살았던 한 용감한 여왕의 이야기이다. 과거 로마와 맞선 막강한 제국 카르타고를 건국한 사람은 그 유명한 디도여왕(혹은 ‘엘리사’라고 함) 이다. 기원전 814년에 카르타고를 세운 페니키아의 디도 여왕은 페니키아의 항구도시 티로스(지금의 레바논 지역)의 공주로 부유한 삼촌 시카에오스(혹은 시카르바스)와 결혼했다. 티로스의 왕이자 디도의 오빠인 피그말리온이 재산을 빼앗기 위해 시카에오스를 살해하자, 이에 혈육인 오빠에게서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느낀 디도는 충격에 삐지고, 바로 자신의 추종자인 귀족들과 부하들을 데리고 함께 오빠 피그말리온 왕에게서 도망쳐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로 도망쳤다.

 

남편의 재산을 챙겨 티로스를 탈출한 그녀는 중간에 키프로스에 들러 80명의 처녀들을 납치해서 배에 싣고 튀니지에 상륙할 정도로 두둑한 배짱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튀니지에 도착한 그녀는 그 지역 베르베르족의 통치자였던 이아르바스와 협상을 한 결과 쇠가죽으로 덮은 만큼의 땅을 얻겠다고 약속하고 땅값으로 황금 잔을 이아르바스에게 주었다고 한다. 디도여왕은 기지를 발휘해 쇠가죽을 가는 끈 모양으로 잘라 광대한 크기의 땅을 에워싸 그들의 정착지 확보에 성공했다. 역사 이래 최고의 부동산 재테크 기술이 아닐까?

 

허를 찔린 이아르바스는 디도여왕에게 결혼하자고 계속 치근덕거렸다고 한다. 물론 디도여왕은 계속 핑계를 대며 거절하였고 시간을 끌면서 카르타고를 건설했다고 한다. 카르타고는 후에 무역과 군사력에 있어 로마 제국의 강력한 경쟁국이 되었고, 로마에게서 멸망당하는 운명을 가지게 되었는데, 쇠가죽으로 땅을 얻은 유래가 있기에 언덕 이름도 Byrsa가 된 것이다. 그리스어로 byrsa는 “쇠가죽”이고 페니키아 말로 bosra는 “성채”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동화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무슨 여왕인데 정확히는 몰랐다가 이곳에서 바로 디도 여왕이란 사실에 더욱 친근감이 간다.

 

하지만 디도 여왕이 유명한 이유는 비단 카르타고의 건국 때문만은 아니다. 디도 여왕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의 왕자 ‘아이네이아스’와의 불타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더욱 유명하게 알려져 있고, 이 이야기는 극적인 면들이 많아 오페라의 소재로 사용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아이네이아스(또는 에네아스, Aneas)는 트로이 전쟁에 나오는 영웅 중의 한명이며 여신 아프로디테의 둘째 아들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패한 아이네이아스는 가까스로 배를 타고 탈출하게 된다.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방랑을 하던 중 큰 풍랑을 만나 천신만고 끝에 디도 여왕이 있는 카르타고에 상륙하게 된다. 디도여왕은 이들을 위해 만찬을 베풀어주는 등 극진히 환대해 주었고,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의 몰락과 자신에 대해 소상히 말해주었다. 디도여왕은 남편과 사별 후에 스스로에게 독신을 다짐했지만, 사람 마음이 자기 뜻대로 되지는 않는 것이 세상 이치. 곧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로 둔갑하여 찾아온 에로스는 그녀에게 화살을 날렸고 곧 누구도 못 말리는 불같은 사랑을 하게 된다. 화끈한 성격의 여장부라 사랑도 화끈하게 한 모양이다.

 

 드라마에서도 언제나 삼각관계에서 갈등이 시작되듯. 여기서도 심각한 삼각관계로 극적인 갈등이 심해진다. 카르타고가 번성하기 시작하자, 베르베르족의 지도자 이아르바스는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고 배포가 큰 디도에 점점 매력을 느끼게 된다. 무슨 배짱인지 급기야는 청혼을 하며 카르타고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이아르바스는 자기와 결혼해 주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옹졸하게 디도를 협박하려했다. 결혼을 하면 카르타고와 전쟁을 하지 않겠지만 만약 거절한다면 없애버리겠다는 의도를 알아차린 디도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사랑을 따르자니 백성이 울고 백성을 구하자니 사랑이 우는 이 난감한 상황이 닥친 것이다.

 

 자신이 결혼을 하면 남편을 따라 자신의 근거지가 내륙으로 옮겨지게 되어, 지도자가 공백상태인 카르타고는 오래가지 못하고 쇠퇴하게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며, 그렇다고 청혼을 거절하면 그 또한 베르베르족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한다면 카르타고는 풍전등화 같은 운명일 것이다.  이때 아이네이아스는 이탈리아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하는 하면 임무를 디도 여왕과의 사랑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본 제우스 신은 곧 헤르메스를 아이네이아스에게 보내어 그에게 숭고한 사명감을 환기시키고 항해를 계속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아이네이아스는 마음을 돌이켜 디도여왕에게 이별을 고하게 되고, 디도여왕은 아이네이아스를 만류하려고 갖은 유혹을 다해서 설득하려고 했으나, 이미 대업을 이루고자 마음이 떠나버린 아이네이아스와의 이별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긴 이때 남자들은 대업을 이루기 위해 여자를 배신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에게 매달리는 디도를 끝내 매정하게 뿌리치고는 트로이의 유민들과 함께 배를 타고 카르타고를 유유히 떠나게 된다. 디도여왕의 사랑과 자존심에 대한 타격은 너무나도 컸다. 그녀는 마침내 그가 가버린 것을 알고는 전부터 쌓아 두었던 화장용 나무더미 위에 올라 자신의 몸을 찌르고 나무더미와 함께 불태워 버렸다. 도시 상공으로 타오르는 화염이 떠나는 트로이인들의 눈에도 띄었다.

 

 디도여왕의 죽음에 관한 좀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아스'를 통해 전해 내려온다. 여기서는 아이네이아스와의 이별이 아닌 이아르바스의 압력 때문에 자신이 죽으면서 카르타고를 살렸다고 말하고 있다.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이를 소재로 ‘아이네이아스의 노래’라는 뜻의 《아이네이스》를 지었다. 이에 따르면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를 떠난 뒤 카르타고에 닿아 그곳의 여왕 디도와 사랑을 나누는 등 7년 동안의 유랑 끝에 이탈리아의 라티움에 상륙하였다. 아이네이아스는 그곳의 왕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와 결혼하여 새로운 도시 라비니움을 건설하였고 이후 로마제국의 건국 시조로 묘사되었다. 로마제국이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는 운명을 가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얄궂은 운명의 연인들이다. 드라마라면 한을 품은 디도여왕이 로마를 멸망시켜야 할 것 같은데 그와는 반대로 포에니 전쟁 끝에 멸망하게 되니 현실과 드라마는 틀린 듯. 아이네이아스를 잃고 자결한 디도 여왕, 그리고 결국 아이네이아스가 건국한 로마에 의해 처참히 멸망하게 되는 카르타고. 비극적인 시작과 최후를 맞이하는 질긴 로마와의 악연으로 인해 카르타고 가 역사에서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카르타고의 건국신화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역사와 비교하여 보게 된다. 한창 인기 있었던 드라마 ‘주몽’이 있었는데 여기에 졸본 부여의 사람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가 등장한다. 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가 비류(沸流)요 둘째 아들이 온조(溫祚)였다. 우태가 죽자 그는 졸본에서 살았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전한 건소(健昭) 2년(기원전 37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쳐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는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왕비로 삼았던 것이다. 연타발의 딸, 소서노, 백제의 시조인 온조 대왕의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와 디도 여왕은 비슷한 점이 많다. 소서노는 주몽의 두 번째 아내이자 비류(沸流)와 백제의 시조가 되는 온조(溫祚)의 어머니였고, 디도 여왕은 티레의 공주이며 오빠에게 남편을 잃어버리고 도망쳐와 아이네이아스와 사랑에 빠진 것 등이 유사하게 비교가 되면서, 가장 확실한 공통점은 재미있게도 둘 다 나라를 건국한 여장부들이라는 점이다. 시기적으로 디도 여왕이 먼저 살았던 인물이었으나, 국가를 건설하는 포부를 실행했을 정도로 큰 인물들이었다. 두 인물의 사랑과 이별, 남은 여자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 거리가 된다. 많은 사랑 이야기 속에는 남자의 야망과 임무로 인해 희생을 강요당하는 비극적인 여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이야기의 구성은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부여해 주었다. '임무에 희생당한 사랑', 디도와 소서노는 바로 이러한 여주인공으로 지금까지 그 이야기가 전해진다.

 

안토니우스의 공동 목욕탕(Thermes d’Antonin).

 

 

해안을 끼고 있는 안토니우스 목욕탕은 규모면에서 카르타고 지역의 유적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고대 로마 유적지로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남아 있는 기둥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은 높이 15m정도의 기둥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기둥전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얼굴이 조그맣게 보일정도로 커다란 기둥이 관광객들에게 인기이다. 안토니우스 목욕탕 북쪽 지역은 대통령궁이 있다. 이쪽으로는 경계가 삼엄하다고 한다. 가이드가 대통령궁쪽으로는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고 다시 한번 주의를 준다.

 

안토니우스 목욕탕은 BC 146년 포에니 전쟁 승리 후 카르타고에 진출한 로마인이 축조했던 대규모 목욕탕인데 유적을 설명하는 설명서에 의하면 놀랍게도 냉탕, 온탕, 사우나 시설까지 갖추었다고 하니, 이건 뭐 요즘 서울의 대형 사우나에게도 밀리지 않을 만한 규모였으리라 짐작된다. 당시의 로마시민권을 가진 남자의 인구들이 많이 없어서 대부분의 카르타고에 살던 로마의 귀족 남자들이 사용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곳에서 로마인들의 퇴폐적인 문화들이 꽃피웠다고 하는데, 로마는 목욕문화 때문에 망했다는 우스갯 소리도 있다. 유적 곳곳에 쓰러져 있는 굵은 돌기둥만 보아도 과거 웅장했던 이곳의 스파를 상상케 한다. 유적이 있었다고 짐작하게 해주는 석축들만이 잔디밭 위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전체적인 규모로 보아서 이곳에 파견된 로마 군인들과 시민들을 위한 대규모 시설로 추측되는데, 로마의 목욕문화는 매우 발달하여 로마 시대에만 해도 대규모 목욕탕과 소규모 목욕탕을 합쳐 약 1,000여개가 로마 제국곳곳에 성업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는 공동목욕탕이라고 번역을 했다. 실제 설명을 보니 남자들만 모이는 일종의 사교 클럽이란 생각이 든다. 운동과 목욕실, 그리고 상호 친목까지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안토니우스 목욕탕은 로마시대의 훌륭한 건축술을 충분히 활용했는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유적지만 남아있고, 그 기초들만 확인 할 수 있다. 목욕탕이면 물의 사용량도 적지 않았을텐데 물을 어디서 공급해왔는지 궁금하다. 바로 옆 바닷물을 이용한 지중해 해수 사우나도 아니고, 바닷물을 증류해서 물을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때 로마인들은 수로를 건설하여 수십 Km 떨어진 내륙 지역에서 끌어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대단한 로마인들이다.

 

가이드 야지드씨의 말로는 이 목욕탕 시설을 파괴한 사람들은 5세기 이 땅의 주인이었던 반달족(Vandal 族)들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파괴와 약탈에 능했으면 지금도 영어 단어에 vandalism(공공시설물의 야만적 파괴행위)이란 말이 남았을 정도일까. 이들이 폐허로 만들어 놓은 유적지의 돌들은 다시 아랍 정복자들에 의해 튀니스 도시 건설에 재활용되어 쓰였다고 한다. 사용하기 좋게 네모로 절단되어 있으니 그만큼 인력과 비용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런 재활용기술은 특히 이슬람사원에 로마시대나 비잔틴 시대의 미끈한 기둥들이 사용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리고 남아있던 대부분의 유적들도 후에 강타한 지진 덕분에 더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남아있는 것이 이 정도면 대단한 규모라는 것이 실감난다.

 

바닷가의 아름다운 전경을 가진 공동목욕탕은 지금은 많이 훼손되었지만 거대한 기둥과 쓰러져 있는 기둥, 석축들을 보며 과거 웅장했던 로마의 영광을 떠올려 보게 한다. 폐허의 느낌과 남아있는 석재들의 조화가 의류 화보촬영을 해도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다를 바로 눈앞에 두고 시원한 바람과 파도소리를 그윽하게 들으면서 지중해가 보이는 드넓은 부지에 건설된 안토니우스의 목욕탕. 이곳에는 몇 백 개의 방과 온수탕, 증기탕, 냉탕, 수영장, 식당, 담화실 등 갖가지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대리석을 많이 사용한 이 장대하고 호화로운 건축물은 로마의 강대한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비르사 서쪽에 있는 로마의 원형극장은 박물관에서 걸어서 15분 거리로 제국에서 가장 큰 것이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옛 영화에서 남은 부분이 별로 없다. 다른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이 극장의 석재들도 다른 건물에 사용되는 수모를 겪었다.

 

 

루이 9세

1248년부터 1254년까지 루이 9세는 제7차 십자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1250년에는 이집트에서 이슬람군에 패해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270년에 또다시 제8차 십자군을 이끌었다. 그러전투는 해보지 못하고 병을 앓게 되는데 그는 장래 필립 3세가 될 아들에게 크리스트교도로서 왕의 이상을 요약한 「교훈」을 남긴 후 튀니스 근처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성스러움과 덕성은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권기정 기자  john@ttlnews.com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