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거장, 안젤름 키퍼가 품은 가을
2022-10-17 17:57:20 , 수정 : 2022-10-17 17:58:57 | 이린 아트칼럼니스트


▲Wer jetzt kein Haus hat.<지금 집이 없는 사람.>, 2016-2022, 190 x 330 cm 


 

한남동에 위치한 타데우스로팍 서울 지점에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Wer jetzt kein Haus hat> 이란 제목으로 세계적 위상의 저명한 독일 화가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신작 회화를 선보인다.

 

독일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그는 작품에서 짚, 재, 점토, 납, 도료와 같은 재료들을 사용한다. 2차 세계대전의  참담한 비극과 고통 속에서 태어난 작가는  전후에도 전범국이자 패전국으로 혼란했던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가늠할 수 없는 자괴와 고뇌 끝에 예술가의 운명을 선택했다. 독일의 역사와 홀로코스트의 공포라는 키퍼의 주제들을 발전시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이번 전시는 어스름한 나무의 윤곽과 가을빛으로 물든 나뭇잎, 시간이 흘러 속절없이 떨어지는 낙엽, 그리고 서서히 회색빛을 머금는 겨울 나무를 담고 있는 일련의 회화들은 가을을 주제로 변화, 덧없음, 부패, 그리고 쇠퇴를 노래하는 오스트리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 M. Rilke, 1875–1926)의 시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 이는 흘러가는 시간의 황폐함과 인간 삶의 덧없음에 대한 환기임과 동시에 시인 릴케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이다. 


 
유난히 볕이 좋았던 어느 가을날 런던 하이드 공원(Hyde Park)의 풍경으로부터 출발한 작품들에 대해 작가는 "런던에서 보기 드문 특별한 날이었다. 가을 낙엽을 비추는 빛과 폭발적인 색감에 압도당해 호텔에서 카메라를 가지고 나와 사진을 찍고는 작업에 착수했다"고 회상한다. 
 

릴케의 시는 60년간 내 기억 속에 존재해왔다. 나는 많은 시들을 암송할 정도로 알고 있고 그들은 내 안에 존재하며, 이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온다.
 

— 안젤름 키퍼 


본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 회화들은 릴케의 시 중에서도 ‘가을날 (Herbsttag, 1902)’, ‘가을(Herbst, 1906)’, 그리고 ‘가을의 마지막 (Ende des Herbstes, 1920)’이라는 제목의 시로부터 기인한다.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인 릴케는 특유의 강렬하고도 서정적인 운율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그의 깊이 있는 통찰력과 그만의 시선이 담긴 은유와 상징 어휘로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시인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다. 그들을 떠올리고 작품에 대해 묻는다. 시인들을 인용한다기보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안젤름 키퍼

 


두텁게 쌓인 작품의 질감은 수 해를 넘기며 축적된 지층에 켜켜이 더해진 지식과 역사를 암시한다. 안젤름 키퍼는 가을과 겨울 회화 전반에 걸쳐 납과 금박을 사용하였다. 이는 고대부터 전해진 연금술적 과정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두 가지 재료로, 중세 시대에 전성기를 맞은 연금술은 기본적인 금속 재료를 가장 값지고 순수한 물질로 변환하고자 하였다. 



  

작가는 특히 납을 더욱 특별한 재료로 여기며 꾸준히 작품에 활용해왔는데, 이에 대해 ‘인류 역사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재료’라고 설명한다. 납과 금박의 혼용은 영적 깨달음, 초월, 재탄생에 대한 은유로 작용하는데, 이는 계절이 흐르고 변화함에 따라 순환되는 자연의 주기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연금술 연구의 핵심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생명체가 네 가지 필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에 있다. 인간과 자연계를 잇는 이 심오한 연결성은 릴케의 시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릴케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고, 가을에서 겨울로 전환되는 계절의 변화를 통해 영적 세상과 자연계, 그리고 인간 삶을 엮어낸다. 


▲타데우스로팍 전시장 전경, 전시장 하 가운데 위치한 진흙 벽돌의 설치 작품. 전후 폐허가 된 독일에서 보고 자란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된 턱없이 부족한 쉼터에 대한 가슴 아픈 기록의 작품이다. 

 

작품에 담긴 무게 


나무와 낙엽을 담은 회화들 가운데 설치된 홍토벽돌의 설치 작품은 턱없이 부족한 쉼터에 대한 가슴 아픈 상기이자 인간이 만든 것(man-made)을 자연계의 순환으로 연결시키고자 함이다. 키퍼의 작품 세계 전반에 드리워진 어둠과 부패의 무게만큼, 같은 정도의 희망 또한 공존하며 이는 릴케의 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전시는 10월22일까지.

 

이린 아트칼럼니스트
art-together@kakao.com

 

#프리즈서울#안젤름키퍼#타데우스로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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